15화

다시 도로 위에서 배달 라이더의 시간

by Asurai

자동차 쇼룸 대신

기름 냄새 나는 주유소 앞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손에 쥐고 있던 열쇠는

고급 세단 키에서

작고 가벼운 오토바이 키로 바뀌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내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걸고,

조용히 배달앱을 켰다.


화려했던 명함 대신,

이제 내 손에는 종이 영수증이 쌓였다.


새벽 4시, 국도 위에서


어둠과 싸우며 달리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시 이런 길을 달리고 있네.”


자동차 매장에서

바퀴를 굴리던 시절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제 나는

누군가의 식탁 시간을 지키는 사람,

누군가의 배고픔을 대신 채워주는 사람.


그리고 그건

창피함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이유였다.


배달 가방을 메고 달릴 때,

그냥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도 길이다.

이 길 끝에서 나는 또 일어날 거다.”


컵라면과 침묵


편의점 테이블, 주유소 벤치,

버스정류장 테이블 위.


그 어디에서든

컵라면 뚜껑에 기다림을 눌러두며 버텼다.


고개를 숙이면

녹슬어가는 헬멧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었다.

비가 온다고 피울 곳으로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에서만

조용히 이런 말을 되뇌었다.


“여기서 멈추지 마.”


돈보다 더 아팠던 건 ‘멈춤’


돈이 없어서 힘든 게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게 더 아팠다.


한때는

가족에게 선물도 하고

남들처럼 세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아무 말도 없이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내 마음은 매일 조금씩 호출음처럼 울렸다.


띠링. 오늘도 살아야 한다.


누군가 묻는다


“그때 후회했어?”


후회?

아니,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냥 이해했다.


인생엔 오르막에도,

숨 돌릴 평지에도,

가끔은 내려가야 하는 길도 있다.


내려가는 걸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 건

바로 그 시절 덕분이다.


어느 날, 배달을 마치고

헬멧을 벗는데 내 얼굴이 보였다.


놀랐다.

예전처럼 힘든 표정이 아니었다.


눈 속엔

조용한 불이 있었다.


무너져본 사람만이 갖는

저 밑에서 올라오는 불씨.


그리고 나는 중얼거렸다.


“괜찮아.

다시 올라가기 전에는

이런 길도 필요해.”


오토바이 시동이 켜지는 소리가

다짐처럼 들렸다.


오늘은 조금 더 나아지겠다고,

오늘도 달릴 거라고,

오늘도 살아남겠다고.


그리고 아주 천천히 새로운 생각이 싹텄다


달리며 문득 떠오르던 생각.


“나는 언제까지 남이 만든 길만 달릴 거지?”


그 질문이

처음엔 조용한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제는 더는

누군가의 시스템 속에서

소모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나만의 길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그때의 나도 아직 몰랐다.


다만 분명했던 건 하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응원은 제게 다시 일어설 용기가 됩니다.

오늘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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