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열둘
요리책은 아닙니다만
모두를 위한 밥상이야기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열한 번째 전국경제투어는 충남이었다. 해미읍성 앞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소머리곰탕집에서 지역경제인들과 함께 하는 오찬간담회가 있었다. 점심 메뉴는 가마솥에 고아낸 소머리 곰탕과 수육이다. 해미읍성 앞에서만 18년째 소머리곰탕을 만들어왔다는 주인장에게서 한가지 일을 오래해 온 장인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그 지방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탕국집이 있다. 현지인 맛집답게 뽀얗게 우러나온 소머리 곰탕 국물은 맑으면서도 구수하다. 푸짐하게 접시에 올려주는 소머리수육도 잡내가 나지 않는다. 새우젓을 곁들이니 쫄깃하면서도 부드럽다. 곁들여나온 깍두기와 김치는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전라도 김치처럼 진한 젓갈 맛나는 김치는 아니지만 새우젓으로 담가 익힌 시원한 맛이 뜨거운 곰탕 국물과 잘 어울린다. 곰탕을 먹을 때는 또 청량고추를 된장에 찍어 한 입 먹어주면 칼칼하고 개운하다. 세상사도 그렇치만 음식도 강약과 음양의 조화가 중요한 것 같다.
오전 일정이 조금 지체되는 바람에 늦은 점심을 하게 된 터라 조금 출출한 채로 시작된 오찬간담회였다. 그래도 대통령님은 식사를 하시면서 지역경제인들이 들려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경청하신다. 딱딱한 자리가 아니라서 이야기가 더 진솔하고 편하게 오간다. 대통령께 직접 이야기를 드릴 수 있는 자리가 흔치 않다보니 참석한 경영인들 모두 자기 발언 순서를 기다리는 눈치다. 내 바로 맞은 편에 앉은 분도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린다. 작은 종이 가득 대통령님께 드리고픈 말씀을 적어오신 눈치다. 깨알같이 써온 메모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순서를 기다리느라 밥을 한술도 뜨지 못하신다. 그런데 어쩌랴!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어 발언 순서가 오기도 전에 오찬이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보는 내가 다 애가 탈 지경이었다.
“그 메모 이리 줘보시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던 겁니까?”
이동이 불가피한 상황이라 나는 앞자리 분에게서 메모를 전해 받았다.
메모가 적힌 종이를 건네주신 분은 반도체 부품인 웨이퍼를 만드는 천안의 제조업체 MEMC의 부대표님이셨다. 청와대에 돌아와 차분히 알아보니 MEMC는 대만의 글로벌 웨이퍼스 자회사였다. 반도체 집적회로나 태양 전지에 사용되는 기본 재료인 실리콘 웨이퍼를 생산하는 곳인데, 실리콘 웨이퍼는 반도체 제작의 핵심 소재라 할 수 있다. 컴퓨터부터 통신기기, 생활가전 등 전자제품 전반에 사용되는 부품인 것이다. 삼성에 주로 납품을 하는 회사였다. 우리나라에서 반도체부품을 생산하는 소중한 외투기업이라니 반가운 마음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여러 대안을 모색하던 상황이었다. 일본이 우리 수출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주원료로 쓰인 3개 품목을 수출 규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일본의 참의원 선거가 다가오면서 한국을 대상으로 하는 분풀이식 여론조성은 더욱 격렬해 지고 있다. 국내 정치에서 불리한 일본이 무역보복을 통하여 이겨보려고 하는 것인가 답답할 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기업과 소통하고, 국민들의 지혜를 모으면서 견딜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은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인 만큼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8.15를 앞둔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가 이뤄졌기에 대통령의 8.15 메시지에 대한 고심이 컸다. 내가 TF단장을 맡아 8.15 기념사를 준비했다. 신동호 비서관이 쓴 초안에 대통령님의 의지를 더 담아내야 했다. 그래서 그 의지를 국민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고심 끝에 완성된 8.15 기념사에는 역대기념사 보다 더 많은 경제 이야기가 주요메시지로 담겼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세 가지 목표로 ‘포용과 상생의 책임 있는 경제강국’, ‘대륙과 해양을 잇는 교량국가’, ‘평화로 번영을 이루는 평화경제’를 제시하시며 경제독립을 선언하셨다. 아무도,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위한 실질적 바탕,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기필코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다.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가 발표된 뒤에 국민들의 분노는 운동의 형태로 번지기 시작했다. 맥주와 의류를 비롯한 일본제품들에 대한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본 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마음을 보태주고, 의지를 다지는 마음은 감사함을 넘어 감격이었지만 한편으론 무겁게 다가왔다.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미래로 가야 할 두 나라, 상생을 위해 소통하고 협력해야 할 두 나라 사이에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가. 역사를 과거로 되돌려서는 안되는데, 어떻게 이 파고를 넘어야 할지 걱정이 많았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우리 경제의 타격을 줄이는 일, 당정청은 즉시 머리를 맞대고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종합대책을 안건으로 하는 협의회를 만들었다. 일본의 안보상 수출 심사 우대 국가 제외 결정에 따른 실질적 대책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선 합리적 근거 없이 이뤄진 일본의 수출규제조치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동시에 우리 산업의 대외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경제체질을 근본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제도와 지원책을 마련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예산, 법령, 세제, 금융 등 가용한 정책수단을 총동원해서 소재·부품·장비 기업을 도와야 했다. 소재·부품·장비산업 관련 핵심원천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액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 6대 분야 100개 핵심전략품목에 대한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자는 안이 나왔다. 수입선 다변화, 외국인 기업 투자유치를 병행하기로 한다. 일본 수출규제로 한국경제가 흔들리는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고, 상황을 체크했다. 그러는 내내 깊은 잠이 오질 않았다.
청와대에서 일하는 동안 전쟁 같은 날들을 수없이 겪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떨리는 결정은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었다.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내린 주요 원인은 아시다시피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였다.
양국의 국제적 신뢰를 져버린 일본과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의지였다. 지소미아 카드를 통해 일본의 태도가 바뀌기를 기대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과거사 문제를 경제 문제와 연계시킨 일본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로 대응해왔고, 1년 마다 종료와 연장을 하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지소미아의 종료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외교라인이 마지막까지 일본과 대화를 해나갔지만 아베정부는 우리 정부의 백기를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결국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하게 됐다. 우리 정부로서는 언제든지 한일 군사 비밀정보보호 협정 효력을 종료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일본도 알고 있었다.
곧바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지소미아 종료결정에 반대하는 단식을 시작했다. 청와대 앞에서 단식 농성 중인 황교안 대표를 찾아가 대통령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수출규제 문제와 지소미아 문제는 국익의 문제라는 점, 추운 날 이렇게 단식까지 하시며 걱정을 하시게 해서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단식 중인 황교안 대표를 만나고 돌아가는데 여러모로 생각이 많았다. 돌이켜 후회가 없을 해법은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침 티타임에서 칠레 폭동으로 인해 한 아세안, 아셈회의가 취소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천안 MEMC 제2공장 준공식에 참석하는 일정을 보고드렸다. 이미 정책실에서도 챙겨온 일이다. 대통령께서 물으신다.
“정무수석이 왜 거기에 가요?”
대통령님께 일전의 경제투어 점심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과 MEMC기업에 대해 말씀 드렸다.
“그런 의미 있는 자리라면 내가 갑시다“
대통령님이 선뜻 나서신다. 대통령님이 나서시니 장관들도 동행을 하게 된다. 천안 MEMC 제2공장 준공식의 참석자들 범위가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여러 의미를 갖는 오늘같은 날에 소부장 기업을 방문한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반도체 산업 경쟁력에 더해 소재·부품·장비 공급이 안정적으로 뒷받침된다면 반도체 제조 강국 대한민국을 아무도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4개월 우리 기업·정부는 핵심 소재·부품·장비 수급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국내 생산 확대와 수입 대체 노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우리나라 제조업의 버팀목입니다. 한국은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를 아우르는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할 것이며,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에 세계 최대의 수요시장이 될 것입니다.“
갑작스런 자리였지만 대통령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어떤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준공식을 마치고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는 MEMC에 근무하는 다양한 직급의 직원분들과 격의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경청하신다.
"다들 애사심보다 애국심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던 대통령님의 말씀에 모두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몇 달 전 소머리곰탕을 두고 건네받은 메모 한 장이 이어준 특별한 인연이었다.
이후에도 코로나와 아베 총리의 사임 등으로 수출규제 파장은 예상보다는 커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커다란 숙제가 남았다. 한국경제가 일본의 소재, 부품, 장비에 계속 의존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식의 위협에 롤러코스터를 타야 한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 일본 정부가 또 다른 경제보복을 해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해야 한다. 관련 제품의 국산화와 수입의 다변화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런 열린 구조 속에서 우리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해나가야 한다. 하나의 고비를 넘어서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다음과 그 다음까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흔들리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불안에서 지혜를 얻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미래를 생각하는 더 큰 그림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강기정의 <청와대 밥상 이야기>는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