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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와 행복

[책 추천] 개인주의자의 철학 수업

나는 도서관의 신간 코너를 좋아한다. 도서관이기 때문에 몇주 전, 한 달 전에 출간된 엄청 뜨거운 신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 세 달 전 출간된 책은 볼 수 있다. 내가 신간을 찾는 이유는 요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간 코너에 있는 책들을 빼서 펼쳐보고 다시 꽂기를 반복하던 찰나에 눈에 띈 책이 바로 마루야마 슌이치의 '개인주의자의 철학 수업'이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개인주의자', '철학', '수업'이라는 키워드가 다 너무 딱딱하달까. 하지만 내 눈을 이끈 건 바로 프로이트의 빙산 일러스트 안에 있는 '어떤 철학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라는 소제목이었다. 늘 더 행복을 찾아 떠다니는 행복 방랑자로서 끌리지 않을 수 없지.


이 책을 쓴 저자는 마루야마 슌이치지만 책소개에 나온 것과 같이 '개인주의'를 통해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깨달은 위대한 사람들의 철학을 작가의 시선으로 해석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왜 '수업'이라는 표현이 붙는지 알 수 있다. 옆에 있는 친구가 책에 대해 설명해주듯이 편안한 말법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결코 가볍거나 어디선가 들은 내용이 아닌 새로운 깨달음을 줘서 열심히 필기하면서 읽게 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인지하지도 못했던 내 안의 문제를 풀어가고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새로운 자유론과 행복론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주의는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 요즘 시대에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개념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개인주의는 건방지고 오만한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별화된 개인들이 함께 이타적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삶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할 때보다 집단의 압력이 강할 때, 강한 압력과 기대에 부응하려 애쓸 때 생깁니다. 문제는 주어진 기대에 맞추기 위한 열정에 과몰입을 하게 되면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로 계속 결핍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갈수록 개인화되고 다양화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더 집단화되고 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개성에서도 여러 집단이 생기고, 취향에서도 여러 집단이 생기기 때문에 진정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가장 개인적인 영역인 취향에서조차 어느 집단에 속할까 라고 생각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그래서 마치 그러한 하나의 집단에 소속되지 못하면 도태되고 있다는 불안감 또한 생기고, 이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한다.
“이 개인주의라는 말의 뜻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략) 다른 존재를 존경하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존경한다는 것이 내 해석이니까요.”
_ 나쓰메 소세키, <나의 개인주의>
자기 개성을 가꿔나갈 자유를 느끼면 타인의 자유에 대한 이해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소세키는 순서를 바꾸어 타인의 자유를 이해하는 것을 먼저 실천해보라고 제안합니다. 타인의 생각, 타인의 ‘개인주의’를 존중함으로써, 나의 ‘개인주의’도 주장할 수 있는 자유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야말로 진정한 존중과 배려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개인주의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지만 습관적으로 하는 언행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타인을 보며 "이상하다.", "별나다.", "왜 저래" 라는 말을 속으로든 밖으로든 하기 마련이다. 이는 집단의 기준의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지 않는 걸 할 때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이 모여 개인을 더욱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나는 상대의 ‘나’를 제대로 봐주는 사람일까. 상대방에게서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습이네’라는 걸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게 긍정적인 모습이면 좋겠지만, 보통은 실망하고 놀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잘 알 수 없으니까요. 다만 그 다름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관계란 그 이해의 과정을 통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 문단을 읽으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은 만큼 타인 또한 그렇게 인정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나도 참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멀어진 관계를 돌이켜보니 나 또한 그 사람을 이해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나답게’ 산다는 건 스스로 나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사회가 변하고 타인이 나에게 어떤 충격을 주더라도 ‘내가 원하는 어떤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면 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스스로 생각하기’입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려면 데이터에 무조건 의존하지 않는 것은 물론, 언어 능력을 함께 키워야 합니다. 생각은 말과 글을 통해 진화합니다. 막연하게 느끼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더 정확한 표현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무엇이든 정량적 수치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데이터로 쉽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세상이다. 하지만 데이터를 너무 의지해서 우리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배제한다면 예상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혼란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정말 푹 잘 자고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스마트 워치에는 '얕은 잠'이라는 정량적 수치의 결과가 나온 경우일 때 우리는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데이터를 바라보되 그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 의심하고 스스로 생각해보는 과정이 중요한 요즘이다.


그런데 꼭 자신의 기분을 잘 알아야 하는 걸까요. 내 기분을 내가 잘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집단’ 안에서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 기분을 내가 모르면 ‘동조압력’에 따라 움직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동조압력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혼자서 "NO!"라고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NO!"라고 했을 때 받아야 하는 비난도 작지 않다. 인터넷 댓글창만 봐도 자신과 같은 의견에는 공감하고 지지하지만 다른 의견에도 '다르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틀렸다'라고 생각하며 그에 또 비난하는 대댓글을 달며 싸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이 또한 동조압력의 현상인 듯하다.
자유는 본디 고독, 책임과 함께 부여되는 것입니다. 고독과 책임을 각오하지 않은 채 손에 넣는 자유란 감당하기 힘들고 다루기 어렵습니다. 자유는 인간 행복의 필수 조건이지만 고독과 책임을 각오하지 않고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고 행복해지기도 어렵습니다.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는 것은 노력하지 않거나 게으르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를 맴도는 삶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대개 개인주의로 인해 소외되고 고립되어 문제가 생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집단성 때문에 자유하지 못하고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책임과 고독을 각오하지 않은 채 집단에 나와 홀로 남게 되자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다, 자유롭고 싶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그냥 얻게 되는 잠깐의 자유와 행복은 이후에 더 큰 고통을 줄 뿐이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란 고독과 책임을 각오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때 주어진다. 나 또한 계속 제자리만 맴돌던 삶에서 전진하기로 결정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때 뒤따라오는 고독감과 책임감으로 인해 버겁거나 육체적으로 힘들 때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마음은 가장 편안하다. 드디어 내가 가야하는 곳으로 잘 가고 있다는 생각 덕분이다. 이는 단기적인 목표보다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가는 것과 같다.


몽테뉴가 “너 자신에 대해 말을 너무 한다”며 비난하는 이들에게 시원하게 날리는 말도 인상적입니다. “그러는 너야말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라고 일갈합니다. 남을 품평하는 데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품평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신경을 씁니다. 품평이라는 것 자체가 주변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는 일입니다. 남의 시선만 신경 쓰다 자신의 장점을 도리어 퇴행시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이 글을 보자마자 익명의 댓글러들이 생각났다. 유튜브나 인스타, 블로그 등 자신의 계정에는 아무것도 올리지 않고 자신에 대한 것을 아무것도 알리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사진과 글에 대한 품평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인생을 시간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깝다.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만 해도 바쁠텐데 남의 시선을 너무 신경쓰다 보니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남의 눈에 티눈만 빼내려 하는 꼴이다.


예술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다릅니다. 다큐멘터리와 영화가 분명히 다르듯이, ‘창작’이라는 예술적 행위는 현실로부터 거리를 둘 때 탄생합니다.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예술가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 쉽지 않은 거리두기를 해내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이니까요.


인간이 만들어낸 대도시와 달리 자연에서는 만나는 모든 것이 유쾌하고 흥미로우며 괴로움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왜 자연 앞에서 인간은 시름을 잊을 수 있을까요. 소세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괴로움이 없는 것은 왜일까. 그저 이 경치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보고, 한 권의 시로 읽는 까닭이다. 그림이자 시인 이상 땅을 받아 개척할 마음도 들지 않고, 철도를 깔아 한몫 챙기려는 요량도 생기지 않는다. 그저 이 경치가 요깃거리도 되지 않고 월급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 이 경치가 오로지 경치로서만 내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고생도 근심도 따라오지 않은 것이리라.
(중략)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알 만한 여유를 가진 제 삼자의 위치에 서야만 한다. 제삼자의 위치에서 서야만 연극을 보았을 때 재미있다. 소설도 읽었을 때 재미있다. 연극을 보고 재미있어하는 사람도 소설을 읽고 재미있어하는 사람도 자신의 이해득실은 문제 삼지 않는다. 보거나 읽는 동안만은 시인이다.”
‘제 삼자의 위치’에 서면 어떤 ‘여유’가 생깁니다. 이런 여유가 있을 때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예술을 탄생시킵니다.
수많은 잡음에서 벗어나 좋은 풍경을 넋 놓고 보는 것과 같은 ‘몰입’의 순간을 얼마나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행복은 그 횟수와 정도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예술은 마치 자연과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을 읽고,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완전히 무엇인가를 잊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기분을 느낍니다. 수많은 관중들과 함께 관람을 한다고 해도, 작품과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이것이 예술이 가지는 에너지입니다.


내가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효율적인 삶을 원한다. 이제 유튜브 뿐만 아니라 영화도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점점 갈수록 성인 ADHD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무언가 하나를 진득하게 앉아서 하는 것이 힘들고 혹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릴스같은 숏폼이 뜨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난 여전히 숲이 우거진 공원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좋고 이해속도가 느려서 그런지 하나를 천천히 그리고 진득하게 보는 것이 좋다. 사실 내가 대단한 배경, 직업, 돈을 가진 것도 아닌데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복하게 느낄 수 있는 이유를 알게 되어서 감사하다. 앞으로 사소한 감정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깊이 생각해보고 찾아보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고전을 읽는 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정원에서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가는 시간을 갖는 일입니다. (중략) 그러나 수많은 책 중에 ‘고전’으로 살아남은 책은 ‘정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대화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기에 사랑받는 것입니다.
좋은 고전을 읽을 때 자신과의 대화가 잘되는 이유는, 그런 고전이야말로 글쓴이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책이기 떄문입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시작과 똑같은 기분으로 인생을 끝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내 인생의 출발점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직관적으로 '시작한다'는 기분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잣대가 아니라 나의 양심, 자유, 생각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은 매일 ‘시작하는’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고전이란 따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늘 읽기를 두려워했다. 이 책에서 고전을 다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고전을 왜 읽어야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줬다. 그로인해 내가 이 세상에서 개인으로 그리고 타인으로 공동체로 어떻게 살아가야 서로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이것이 정답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나에게는 삶을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침서가 되어주었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반을 굳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모두가 이렇게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결국 서로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갖추기 위해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같이 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개인주의를 오해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나'는 사라진다. 그래서 분명히 잘 살고 있는것 같은데도 '이게 내가 진짜 원하던 건가?',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지?'하며 타인의 생각과 내 생각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어느새 내 삶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은 계속 불행해진다. 나도 그랬다. '사회에서 보는 나, 친구들이 보는 나, 가족이 보는 나'에 갇혀서 솔직하지 못했고 그로인해 많은 스트레스들이 쌓였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나'와 대화하며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거치자 이제는 진짜 '나'를 알아가고 표현하고 있고 그로인해 당황스러워하는 주변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나는 이전보다 훨씬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졌다. 혹시나 나와 같이 타인의 시선에 갇혀 뭔가 모를 답답함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개인주의자의 철학 수업' 책을 통해 진정으로 자유로운 '나'로 살아가야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해 알아가고 그것이 세상을 더욱 이롭게 만들어간다는 새로운 깨달음도 얻어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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