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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문정 Jul 14. 2023

코코스판의 눈빛

-빈털터리 주인과 떠도는 방랑견-


내겐 가끔 생각나는 눈빛이 있다. 그리운 사람들의 눈빛이 있는가 하면, 영화나 영상에서 본 슬픈 눈빛이나 사랑 가득 담긴 눈빛도 떠오른다. 그 많은 눈빛 중에서 어느 해 만난 코코스판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찬 바람 부는 늦가을 저녁나절이었다. 나는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빵집에 들렀다. 그곳엔 빵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문밖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 줄에 섰는데 주위는 어느새 어스름해지기 시작했고 햇살이 사라지니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때 빵집 근처 벤치 아래 낮은 기둥에 줄에 묶여 있는 황갈색 코코스판이 눈에 띄었다. 대체로 코코스판은 장난기가 많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개는 짧은 줄에 묶여서인지 기운이 없어서인지 벤치 옆 차가운 바닥에 앉아서 움직임 없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빵집 안으로 들어가서 개 주인이 누구냐고 물어봤다. 계산대에서 빵집 종업원이 가끔 오는 '거지 아저씨' 라고 했다. "세상에 저렇게 짧은 줄에 강아지를 묶어 놓고 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지에게 타박을 하며 빵집을 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코코스판 옆에는 작은 돈통이 있고 벤치 위에는 거지 아저씨 배낭이 보였다.


내가 자꾸 보는 걸 느꼈는지 코코스판도 나를 봐서 눈이 마주쳤는데 '그 녀석 참 잘 생겼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이목구비가 예뻤다. 무엇보다 그 눈빛이 마치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전해져 왔다.


그렇게 잠시 나를 보던 코코스판은 다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코코스판이 본 건 내 뒤쪽 할머니가 데리고 온 프렌치 불독이었다. 벤치 옆에 묶인 채 코코스판은 할머니 품에 안겨 사랑받는 프렌치 불독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할머니만큼이나 멋지게 치장한 강아지는 반짝이는 목걸이와 예쁜 옷을 입고 앙증맞은 신발도 신고 있었다. 할머니는 강아지를 안고 볼을 비비며 "오! 몽 트레조르~ 오! 몽 베베~(오! 나의 보물! 내 아기)"라고 말하고는 프렌치 불독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작은 간식용 을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프렌치 불독이 껌을 물고 자신을 쳐다보자 가만히 앉아 움직임 없던 코코스판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앞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 켜는 몸짓을 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병뚜껑을 앞발로 톡톡 건드렸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몇 번이나 요리조리 입으로 밀기도 하고 두 발로 갖고 놀다가 이내 병뚜껑을 입에 넣고는 마치 맛있는 것을 먹는 것처럼 오물거렸다.


프렌치 불독은 그런 코코스판을 한참 보다가 할머니 다리를 긁으며 낑낑거렸다. 할머니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강아지를 두손으로 올려 품에 안았다. 총명하고 자존심 강한 코코스판은 프렌치 불독이 시야에서 멀어지자마자 오물거리던 병뚜껑을 뱉어 버렸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 다시 자리에 앉아 사람들 서 있는 빵집을 외면한 채 시선을 반대편 먼 하늘에 두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더구나 가슴속에 시린 아픔이 휘몰아친 건 잠시 일어섰던 코코스판이 유난히 야위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게뜨를 사려고 기다리 줄에서 벗어나 코코스판이 먹을 만한 것을 사기 위해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프랑스 대형마켓에는 개 사료와 간식을 판매해서 적당한 것으로 고를 수 있었다. 빨리 갖다주고 싶었으나 저녁시간이라 계산대에는 사람들로 붐볐고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겨우 계산을 마치고 빵집 앞으로 가는 길이 왜 그리 멀게 느껴졌는지!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그곳에 도착하니 벤치 근처에 코코스판은 사라지고 어둠만이 채워져 있었다. 갑자기 가슴 속이 무너져 내리고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나는 빵집으로 다시 들어가서 "혹시 거지 아저씨 왔다 갔어요? 또 언제 오는지 아세요?" 뜬금없이 물었다. 빵집 종업원은 내 손에 들려있는 개 사료며 간식을 보고서 내 마음을 감지한 듯 대답했다. "글쎄요. 가끔 오는데 언제 올지 잘 모르죠. 코코스판 주려고 사셨나 봐요. 어쩌면 좋아요."


나는 무척 허탈했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보는 빵집 종업원에게 방금 사 온 양식을 건네주며 부탁했다. "미안하지만 갖고 계시다가 혹시 코코스판 주인이 내일이라도 아니 다음에라도 오면 꼭 좀 전해 주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서글펐다. 허기진 채 하염없이 빈털터리 주인을 기다리던 그 눈빛, 모든 걸 체념한 듯 담담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눈빛, 어려운 환경에 있지만 결코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코코스판의 의연한 몸짓과 눈빛, 온갖 감정이 녹아 있는 깊은 눈빛이 어른거렸다.


어떤 사연으로 빈털터리 주인과 함께 떠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느 곳에 있더라도 든든하게 먹고, 사랑받으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잘 지내길 바랄 뿐이다.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생각나는 눈빛, 찬기운 가득한 계절이 오면 유난히 떠오르는 눈빛이 있다. 황갈색 코코스판의 깊고 슬픈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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