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되는 해입니다!
영화나 소설은
간접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무척 좋은 동반자다.
그렇기에 나는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면
책과 영화를 즐겨 본다.
특히 ‘추억의 영화’ 혹은 흑백 필름들은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한다.
아주 어릴 때 모아둔 트럼프 크기만 한
영화 광고 카드들은 비록 낡고
정교하게 인쇄된 것이 아닐지라도 정겹기 그지없다.
개봉하는 영화를 보는 것도 흥미진진하지만
이미 본 영화를 다시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영화를 감상할 때, 내 나이나 심리상태 혹은 계절
그리고 시대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같은 영화라도 볼 때마다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독일 작가 레마르크(1898-1970)가 쓴 <개선문>과
브와디스와프 슈필만(1911-2000)이 겪은 실화를
책으로 출간한 <피아니스트>는 각각 영화로 만들어졌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유태인이고
1938-1944년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비슷하다.
<개선문>과 <피아니스트> 주인공들이 살던
당시 유럽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들이 득세하고 있던
암흑, 공포, 잔학의 시기였다.
시대적인 암울함,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
종교와 사상으로 대립되는 것은
오늘 이 순간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 참 끔찍하고 혹독한 상황에
처했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전쟁이란 거대한 연기 같은 이데올로기로 인해
수백만 명이 고통당하고 죽어갔다는 것에 전율하면서
다시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하는 ‘죽음의 열차’ 앞에서 가족과 헤어질 때
세상의 끝에 선 듯 절망하는 그에게서,
폐허가 된 거리를 아이처럼 울면서 걷는 그의 모습에서,
벽돌을 나르다 떨어뜨려 독일군들에게 불려 갈 때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과 본능적인 무력함을 보이는
그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피아노를 치던 재능 있는 손은
무지와 폭력만이 이글대는 세상에서는
한낱 쓸모없는 도구일 뿐이고,
예술가 역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힘없고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라는
절망감이 나를 슬프게 했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나마 몸을 숨길 수 있었지만
밖에서 문을 잠근 곳,
시간이 정지한 듯한 공간에서 숨죽여 지내며
하염없이 창 밖만 바라보는 슈필만에게서,
독일군 사령관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 후
절망과 허탈 그리고 수치심으로
다락방에서 흐느껴 우는 그에게서
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혼자일 때 인간은 지극히 나약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과 공포 앞에서
비굴해 보일 만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극도의 굶주림 속에서
그 누구라도 슈필만처럼
처절한 몸짓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만일 내가 그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
내 이웃은 어떻게 행동할까?
반대로 내 이웃이 슈필만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