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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문정 Jun 04. 2024

사이프러스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

다시 보는 <감동 가득한 사람이야기>  1화 <빈센트 반 고흐와 테오>

[대문사진] 고흐가 1890년 생 레미 드 모죨에서 세번째로 그린 <사이프러스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



다시 보는 <감동 가득한 사람이야기> 1화 <사이프러스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수많은 공간을 오갔다. 그가 태어난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영국과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에서 5년간 머물며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는 힘겹고 지난한 시간을 거쳐 마침내 오베르 쉬르 우아즈 밀밭에서 고단함이 배어있는 가방과 지상의 승차권을 내려놓았다. 그가 농촌마을로 오기 전 머물던 곳은 프로방스 지방, 생 레미의 생 폴 드 모졸 정신병원이다. 지금은 빈센트 반 고흐 기념관이 되었으나 그는 그곳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그의 자취를 따라 생 폴 드 모졸을 찾은 때는 가을이었다. 9월인데 주위는 깊은 겨울처럼 적막하고 스산했다. 인적 드문 외딴곳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뜨락에 <붓꽃 >과 <사이프러스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 <피에타> 등 빈센트 그림이 눈에 띄었다.


그림 배치로 봐서는 미술관 입구 같은 분위기지만 병동 입구, 복도와 계단 곳곳에 음울함이 배어 있었다. 2층 병실엔 빈센트가 희망처럼 바라보던 유리창 너머로 해바라기가 이랑을 따라 피어있고 멀리 밀밭도 보였다. 그러나 창문으로 보는 공간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므로 의사 페이롱은 그를 배려해 병원 바깥으로 나갈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 덕분에 빈센트는 병실에 갇혀 있었다면 결코 표현할 수 없었을 풍경과 색채를 화폭에 옮겼다.


이곳에서 완성된 많은 작품 중에 내 마음을 흔든 건 <울고 있는 노인>이다. 1889년 그려진 초로의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두 팔꿈치를 여윈 다리에 의지한 채, 양손으로 눈과 얼굴을 감싸고 있다. 그는 괴로움에 휩싸인 채 울고 있는 것이다.


살얼음판을 걷듯 살던 화가가 느끼던 절망이 <울고 있는 노인>에게 온전히 스며들어 보는 사람들 가슴에 전해진다. 초라한 모습으로 울고 있는 남자는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의 상징이며, 빈센트 자신을 투영시킨 모습이라 더 처절한 절망으로 다가온다.


빈센트 반 고흐, <울고 있는 노인>, 1889.


그렇듯 고독하고 슬프게 살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세상 사람들은 왜 좋아하는 것인가?

 아마도 우리 마음 안엔
빈센트의 열정과
그가 느끼던 고독이 잠재해 있고,
그가 찾고자 했던 사랑과 꿈길을 함께
하고 싶은 염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고통 속에서 환한 빛을 본 것처럼, 사람들도 그런 희망의 빛을 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빈센트 그림을 좋아하는 것이며, 지상에선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그의 삶마저 연민하는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머문 오베르 쉬르 우아즈와 몽마르트르에는 그의 생애를 다섯 단계로 요약한 그림 안내판이 있다. 첫 번째 판엔 그가 ‘여행자’라고 씌어있다. 그렇다. 그는 많은 곳을 다녔으나 그 여행은 즐거운 것이 아닌 절박함이었다. 빈센트 여행은 방랑에 가까웠다. 떠나는 자체가 삶이었고, 일상이었으며, 작품의 일부였다.


한 곳에서 정착할 수 없이 떠돌아야 했던 화가는 하루하루가 불안했고, 그림 재료는 물론 한 끼 식사조차 할 수 없는 때도 많았다. 동생 테오에게 돈을 부탁해야 하는 괴로움은 절망으로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작품에 전념해서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가난한 화가에게는 자연의 빛과 색채를 온전히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재능과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으로 가기 위해 파리 북역에서 기차로 네 시간을 달려 그곳에 닿았다. 11월의 잿빛 하늘을 바라보며 이 도시를 거닐었을 고흐를 생각했다. 젖은 옷을 걸친 것처럼 찬 기운이 뼛속으로 스며드는 춥고 음울한 겨울날, 청년 빈센트도 이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성공하고 싶은 열망도 있었을 테고, 따뜻하고 열정적인 사랑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빈센트의 자취를 따라 걸으며 그의 삶을 그려보았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 준데르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순탄치 않은 유년기를 보내고 파리와 런던 등지에서 삼촌들이 경영하는 화랑에서 일했으며 목사가 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왔다.


그가 푸른 희망을 갖고 암스테르담에 온 때는 1877년 스물네 살 되던 해였다. 그곳에 살고 있던 친삼촌 얀과 외삼촌 스트릭커는 목사가 되겠다는 조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는 성직자가 익혀야 하는 라틴어 등에 어려움을 느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곧이어 그는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존슨 목사의 추천서를 받아 탄광촌 보리나주로 가지만 거기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당시 빈센트는 그런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었겠으나 만약 그가 원하던 대로 성직자가 되었다면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작품들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절망의 시기에 빈센트는 어린 시절부터 습작하곤 했던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화가인 사촌 모베로부터 조언을 받으며 예술가로서의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빈센트 삶은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가 원하는 일들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사랑 또한 그랬다.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가 다가가는 순간 사랑의 대상은 허공에 물방울처럼 사라지거나 서로 사랑을 다짐했더라도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 상실감과 아픔만이 채워질 뿐이었다. 그에겐 보통 사람들이 갖는 일상의 기쁨이나 행복은 결코 찾아오지 않았다.



다섯번의 사랑,그러나  이루지 못한...... .


그가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 때는 1875년 런던에 머물던 시기였다. 삼촌 화랑에서 일하던 스물두 살 빈센트 마음에 하숙집 딸 으제니 로여는 봄꽃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아지랑이 같은 첫사랑 느낌을 고백했지만 그녀에겐 이미 약혼자가 있었으므로 단념해야 했다.


두 번째 사랑은 가족 모두들 놀라게 한 사랑이었다. 이 사랑은 시작하기도 전에 아리디 아린 실연의 상처만 남았다. 1880년 그가 부모님과 함께 에텐에서 지낼 때, 그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외삼촌 스트릭커 집을 자주 찾았다. 외사촌 케에 보스는 어린 아들을 둔 미망인이었고 빈센트에게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예상치 못한 빈센트의 저돌적인 사랑고백에 충격받고 다시는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사랑의 싹을 잘라버렸다. 그는 타오르는 불 같은 사랑에 자신을 사르는 고통을 느끼며 혼자만의 아픈 사랑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사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빠르게 찾아왔다. 빈센트가 1881년부터 지내게 된 헤이그 빈민가에서 만난 시엔이었다. 마리아 후르니크의 맏딸 시엔은 미혼모였으며, 또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빈센트는 당시 헤이그에서 사촌 모베로부터 그림을 배우고 있었고 삼촌과 구필 화랑 책임자 도움으로 그림을 팔기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둘이나 있는 불우한 여자와 동거하며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빈센트 가족뿐만 아니라 시엔 가족들도 경제능력 없는 남자와 지내는 것에 불만을 갖고 그와 헤어질 것을 강요했다. 이런저런 불협화음과 갈등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시엔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했던 시엔에 대한 그리움과 허탈감에 빈센트는 몹시 괴로워했고 성병과 영양결핍 등으로 쇠약해져 오랫동안 절망의 늪에서 고통을 겪었다.


네 번째 사랑은 1884년 부모님이 있는 누에넨에서 만난 마르고트 베제만이었다. 그녀는 빈센트 그림을 좋아했고 그를 이해하려 애썼다. 그녀는 소박한 아틀리에에 놀러 와서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산책을 즐기며 사랑을 키워갔다. 이 무렵이 빈센트에겐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두 사람이 결혼하려 할 즈음 이번엔 마르고트 집안에서 한사코 반대했다. 깊이 상심한 그녀는 자살을 기도했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빈센트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사랑을 찾았다고 확신한 순간 헤어져야만 하는 현실에 빈센트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심정이었다.


그가 브뤼셀과 보리나쥬, 헤이그, 드레텐, 에텐, 누에넨 등을 거쳐 8년 만에 암스테르담을 다시 찾은 때는 1885년이다. 그는 네 차례의 실연으로 마음은 피폐해졌고 몸도 무척 쇠약해졌다. 그는 그림에 전념하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빈센트는 동생 테오가 있는 곳, 그 어느 곳보다 예술가들이 많고 예술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파리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파리에 처음 온 시기는 1873년이었으나 다시 찾은 날은 1886년 2월 28일이었다. 구필 화랑에서 일하는 동생 테오 집에 기거하며 화가 코르몽 화실에서 에밀 베르나르와 로트레크, 르누아르 등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탕귀 할아버지 화랑에서 포도주 한잔을 마시며 그림을 바라볼 때, 그는 마침내 화가로서 자긍심을 느꼈다. 그렇기에 몽마르트르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흔적이 많다. 그는 후미진 골목골목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즈음 빈센트는 몽마르트르 탕부랭 카페에서 이탈리아 여인 아오그스티나 세가토리와 사랑하게 되었다. 빈센트가 그린 그녀 초상화는 세상에도 잘 알려져 있으나 그녀와의 사랑도 일시적이었을 뿐, 그는 시린 가슴을 달래며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테오와도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해결할 수 없는 경제적 궁핍은 그를 지치게 했으며, 예민한 성격이 자신은 물론 동생 테오를 힘들게 했다. 테오가 아무리 형을 배려하고 지원해 준다 해도 모든 것을 동생에게 의존해야 하는 열악한 상황은 그를 암울하게 했다.


마침내 빈센트는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 지방에 가기로 다짐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이뤄낼 수 있을 듯한 기대감에서였다. 그곳에서 그가 그린 작품들은 프로방스 태양빛처럼 환하고 아름답다. 그는 남불의 뜨거운 빛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 화폭에 채색했다.


1888년 고갱을 기다리던 시기, 아를르 강가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은 빈센트의 바람과 희망이 화사한 빛이 되어 비추고 있다. 하늘에 반딧불처럼 영롱한 별이 빛나고 강물엔 그 빛이 환상적으로 반사되어 일렁인다.


하지만 고갱과의 불화로 인해 절망으로 치닫던 그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것으로 세상과 단절하려 했다. 이후 그가 그린 그림은 확연히 달라진다. 1889년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엔 소용돌이치는 절망에 휩싸인 느낌이 묻어난다. 둥근 별들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의 마음처럼 강렬하다.


빈센트는 아를르 요양원에서 치료받다가 1889년 생 레미 드 프로방스 외곽에 있는 생 폴 드 모졸레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증세가 심해질 때, 그는 발작을 일으키거나 흙이나 물감 등을 삼키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나는 그가 그런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시기부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물론 사랑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동생 테오와
에밀 베르나르 같은 친구는 있었지만
작품은 주목받지 못했고,
경제적인 문제는 단 한 번도 여유롭지 않았다.

 그토록 불안하고 암울한 상황에서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누구라도 그 정도로 힘든 상황이 이어지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창살이 있는 병실에서, 낮에도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하고 쓸쓸한 곳에서 그는 훗날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는 그림을 그렸다. 밤이 되면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외딴 병원에서 전율할 고독감에 휩싸여 두렵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그곳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밤마다 수용되어 있는 환자들의 괴성과 신음소리, 발작 때문에 견딜 수 없으니 제발 내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동생 테오와 페이롱 선생 덕분에 마침내 그는 정신병원을 떠날 수 있었다.


1890년 5월 20일, 그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도착해 라부 하숙집 3층에서 지냈다. 이곳에서 화가는 7월 2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완성작품 80여 점을 그렸다.


빈센트는 나른할 정도로 고요한 마을과 밀밭 길을 맴돌듯 걷고, 또 걸었다. 그 풍경을 날마다 혼신을 다해 그렸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도비니 정원>, <가셰 정원> 등등.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는 실제 가서 보면 그림과 전혀 다르다.


빈센트는 그토록 힘들었지만 그림에선 대상을 신비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표현했다. 화가의 염원처럼 그림에선 평화로움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


몇 해 전 4월 초,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찾았었다.
조용한 시골마을 언덕길을 지나
그림에 나오는 황금빛 밀밭 대신
짙은 흙빛으로 펼쳐진 밭과
그가 묻힌 묘지 주변을 걸을 때,
주위는 너무도 고요해서
내 안의 숨소리만이 느껴졌다.
사람들 모습도 보이지 않는 적막한 공간, 빈센트가 그곳에 앉아
밀밭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앞에 스쳐갔다.



화가는 아침에 눈을 뜨면 그림 도구와 바게트를 든 채 마을 주변을 서성였을 것이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서른일곱 된 가난한 화가는 하늘도 보고 풀과 꽃도 보며 비탈진 길을 따라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에서 한참 동안 교회 정면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따금씩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 “오늘은 부디 훌륭한 그림을 그리게 해 달라”고, “더 이상 절망하지 않게, 희망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곤 밖으로 나와 밀밭으로 갔을 것이다. 추수를 앞둔 밀밭, 태양빛에 반사된 밀짚들의 물결, 빈센트는 그 속으로 들어가 밭이랑에 앉아 밀밭과 하늘을 바라보며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의 숨결을 느꼈을 것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마저 사라진 적막한 공간에서 잠들었다가 해지는 저녁시간 잠에서 깨어나면 견딜 수 없이 허전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노을마저 잦아들어 어둑어둑 해질 무렵, 아무도 기다려주는 이 없는 하숙방에 가기 위해 그는 늘어놓은 화구와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챙겨서 왔던 길로 터벅터벅 걸어가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런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며 죽는 순간까지 수백 점의 작품을 그린 그의 열정과 끈기에 숙연해질 따름이다.


고흐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자화상


1890년 7월 27일 그는 스스로 이승을 떠나려 했고, 29일에 다른 세상으로 갔다. 그토록 사랑했던 형을 멀리 보내는 테오 마음을 어떤 이가 헤아릴 수 있을까?


 동생에게 짐이 되는 것이 괴로웠던 그가 세상과 작별하고자 했을 때, 테오 마음은 형보다 더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형이 사망한 후 심한 충격과 절망으로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이던 테오는 결국 1891년 1월 25일에 그리운 형 곁으로 갔다.


테오 아내 조안나는 상처받고 깊은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가장 가까이서 형제를 지켜본 그녀는 테오와 빈센트가 오랫동안 주고받은 귀한 편지를 정리해 책으로 출간했다.


아울러 테오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 형과 같은 빈센트로 이름 지었고, 조카 빈센트는 삼촌을 위해 암스테르담에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을 설계했다.


전관 3층에는 화가의 유년시절과 가족사진, 테오와 에밀 베르나르, 고갱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으로 시작되는
돈 맥클린 노래 <빈센트>는
멜로디가 아름답고 구슬프다.

 멜로디만큼 마음에 와닿는 건
빈센트 생애를
마치 그가 그린 그림처럼 표현한
서정적인 노래 가사다.



빈센트는 생전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형을 사랑하고 지켜주던 한 사람 동생 테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와 테오 형제애는 감동스럽기 그지없다. 테오는 형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형이 힘들어할 때, 세상을 떠나는 순간조차 함께 했으니 말이다.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작품 전시실에는 늘 많은 관람객으로 붐비며, 그가 마지막 머물렀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역시 그를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890년 생 폴 드 모졸레 정신병원에서 그린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 >은 1888년 아를르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과 확연히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아를르 강가에서 무수히 빛나던 별은 보이지 않고 검푸른 실편백 나무 위 왼편으로 별이라 하기에는 유난히 크게 그려진 보름달 같은 둥근 별과 오른편으론 등불 같은 초승달이 보인다.


그 아래로 두 남자가 걷고 있다. 초승달이 보름달로 차오르듯 언젠가는 희망과 이상의 세계에 닿을 수 있길 바라는 빈센트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두 남자는 빈센트와 동생 테오의 모습으로 겹쳐진다. 아울러 그들 뒤에 따라오는 한 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는 그들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함께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 1890.


오베르 쉬르 우아즈 밀밭 옆
고즈넉이 자리한 동네 묘지에
화려한 대리석 묘비들을 지나면
초라하고 소박하지만
가장 빛나는 두 개의 묘비가 시야에 들어온다.

빈센트와 테오가 잠든 곳엔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놓아둔
꽃들이 늘 화사하다.

죽어서 사랑받는 화가 형제는
오늘 밤도 별과 달이 빛나는
꿈길을 다정하게 걷고 있는 것이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마을 공동묘지엔 빈센트와 테오 형제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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