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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문정 Jun 03. 2024

시네마에 Hommage 를! 프랑스 영화에 대한 단상!

문학이 아닌 영화를 전공했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았을까?

[대문사진] 뤼미에르(LUMIÈRE)형제

 형 오귀스트 마리 루이 니콜라 / 동생 루이 장 


시네마에 오마쥬를!


프랑스 영화에 대한


<Amour><Un homme et Une Femme><L'Amant>


나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고, 프랑스 역사와 문화관련된 일을 해 다. 그런 까닭에 프랑스에 대한 뉴스나 칼럼, 문학과 미술, 문화와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이나 그림, 영화평 등을 보면 자동적으로 클릭해서 보게 된다.


나는 문학을 전공했으나 영화를 너무나 좋아한다. 그렇기에 내겐 유년시절부터 변함 없는 꿈이 있다.


언젠가 여유가 되면 집안에 영사기와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서 영화와 사진 슬라이드, 다큐멘터리 작품 등을 보겠다는 희망이다.


물론 요즘 최신형 기기들이 많다.
그러나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사랑과 희망을 비추는 영사기와
그곳에서
다양하게 퍼져 나가는 빛에서
역동적으로 살아나는
또 다른 세상이 너무 신비롭다.

영상 속 정다운 사람들을 보고싶다.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움직이는 사람들과 풍경들을 보고 싶기에
그 꿈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언젠가
힘든 상황 다 마무리하고...... .

 여유로운 날이 오면
차르르르...... .
 잠 든 감성 불러 일으키는
영사기 소리에
나는 또 그렇게 설렐 것이다 !

그 세상에선
그리운 사람들과
체리향처럼 달콤한 시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영화관은 작고 아늑하다. 코로나 이후로는 한번도 극장을 찾은 적이 없으나 코비드 이전엔 오데옹이나 마비용 혹은 몽빠르나스 영화 상영관에서 영화를 즐겨 봤었다.


어느 새 극장에 안 간 지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코비드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괜찮아! 곧 다시 찾을 수 있겠지! 하며 내 마음을 다독일 뿐이다.



프랑스 노르망디 도빌 항구에 늘어선 요트들


프랑스 노르망디 도빌


며칠 전 브런치에 들어서자마자 홈화면에 브런치 북이 보였다. 홈화면의 광고는 내 의지와 관련 없이  반복되어 자동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어떤 때는 눈길도 안 주지만 <시네마>란 제목에 이끌려 클릭했다.


<1>이라는 작가가 올린 여러 글 중에 <I was loved>와 <메멘토 모리> 두 편을 읽어 내려갔고, 그 글에 달린 댓글까지 봤다.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직역하면 '죽음을 기억하라' 정도 될까? 책꽂이에 있는 두꺼운 라틴어 사전을 굳이 펴지 않아도 이 정도 짧은 해석은 가능하지만 혹시라도 더 심오한 뜻이 있을까?


의역하면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라!" 혹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 정도 언저리를 맴돌지 않을까?싶은데 더 좋은 뜻이 있다면 알려주시길 바란다.


<1>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영화는 프랑스 영화  Amour(아무르)(아무~흐)>다.




이 영화는 2012년에 개봉했는데  영화 <남과 여 >(Un homme et Une Femme)의  상징정인 주인공  장 루이 트랭티냥이 오랜 침묵을 깨고 출연한 영화다.


더구나 <아무~흐(Amour)>는 주제가 가볍지 않고 노령 사회로 접어든 현대인들의 고뇌와 책임 등 사회의 이슈로 떠오른 내용을 다룬 영화여서 프랑스에서 개봉하기 전부터 방송과 매체마다 홍보를 많이 했다.


당시에 나는 너무 바빠서 극장에 갈 수 없었기에 시간이 흐른 후에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마주 했다. 그리고나서 그 영화 내용이 전해준 엄청난 무게감 때문에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참고로 Amour(아무~흐)는 우리나라 표기는 '아무르'지만 프랑스 발음은 아무~흐, 아무르보다는 '아무~흐' 뉘앙스가 영화 분위기에 가깝다.


내가 프랑스에 와서
제일 먼저 여행한 곳이 도빌이었다.
영화<Un Homme et Une Femme>
(남과 여)의 배경 공간이다.

내가 좋아하는 옹플뢰르와 함께
영화 배경인 도빌과  
노르망디 길을 참 많이도 달렸더랬다.


프랑스 노르망디 도빌(Deauville) 시청
프랑스 노르망디 도빌 콜롱바쥬 집들




<남과 여>는 1966년 영화다. 끌로드 를루슈가 감독했고 아누크 에메와 장 루이 트랭티냥을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하게 해 준 영화다. 뿐만 아니라 프란시스 레(프란시스 레이)가 작곡한 OST는 '영화음악의 전설' 로 자리매김했다.


1966년 당시 36세였던 장 루이 트랭티냥이 46년 후인 80세가 넘은 모습으로 <아무~흐>를 촬영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공허하고  시니컬한 눈빛,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 표정, 희노애락이 는 세상에서 시간을 견뎌내는 표정, 미묘한 감정변화 조차도 잠재운 그의 표정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왜냐면 그렇게 보이는 모든 건 연기가 아니라 실제 그의 삶 자체에서 배어나온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세월그의 젊음과 중후한 멋을 앗아간 것도 서글펐지만 그보다 더 큰 건 그가 겪었던 극심한 고통 때문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딸로 인해 느꼈을 단장의 슬픔과 원통함 그리고 저주에 가까운 미움과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 사람, 장 루이 트랭티냥을 나는 연민하는 것이다.




장 루이 트랭티냥은
사랑하는 딸이 살해당했을 때
우주가 허물어진 듯
절망했다.

아름답고 재능 있는 마리 트랭티냥은
유명 배우인 부친과
영화감독인 모친 나딘 트랭티냥의
장녀로서 전도 유망한 영화배우였다.



2003년 리투아니아에 촬영 때문에 갔다가 동거남이라 해야 할까? 괴물이라 해야 할까? 살인자 '베르트랑 캉타'란 자의 폭력으로 세상을 떠났다.


록밴드 멤버로 활동하던 그 자는 재판에서 뻔뻔스럽게 말했다. 마리 트랭티냥과 다투다 밀었을 뿐인데 그녀가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혀서 사망했지만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프랑스 사람들은 경악했고 분노했다.


너무도 어이없게 죽은 딸의 사망소식에 부모는 허공과 암흑 속 깊은 심연을 오가면서 딸을 찾아 헤매었을 것이다. 분노와 슬픔, 회환과 상실감이 너무 컸던 장 루이 트랭티냥은 침묵으로 분노를 대신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베르트랑이란 자를 죽여서 사랑하는 딸의 복수를 하고 싶었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고 더 이상 사랑하는 딸을 만날 수 없음으로 인해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몽환의 세상 속을 서럽게 오갔을 것이다.




그렇게 고통스런 시간을 견딘 그가 출연 결정한
영화
<Amour>는
몇 개의 단어와 문장으로
감상평을 하기에는
내용 자체가 심오하고
이쉬움이 많기에
다음 기회에
진지하게 쓸 생각이다.


나는 브런치북 <oo 시네마> 실린 글 <I was loved>와 <Amour>두 편을 읽고나서  다른 작가가 쓴 글을 보게 되었다. 다른 작가는 편의상 <2>로 하겠다.


아무튼 작가 <1>이 쓴 <I was loved>에 작가 <2>가 댓글을 단 걸 봤는데 바로 며칠 후에 <2>작가 <Amour>에 대해 평을 쓴 걸 보고서 같은 영화를 쓸 수도 있겠! 우연일 수도 있겠고, <2>작가 본인도 쓰고 싶어 쓴 것일 거 생각하기로 했다.


<2> 작가는 Amour에 대해서는 짧막하게 언급했고 다른 프랑스 영화 <남과 여>와 <연인>대해 썼다.


<2>작가는 도입부에 다른 설명 없이 첫 문장부터 침대 씬서술했다. 사랑 나누는 남녀의 움직임이 상상되는 침대 시트 소리까지 묘사한 것으로 짐작컨대 꽤 자극적이도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


주인공 안느와 장 두 사람이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본인 얼굴이 붉어진다는 표현까지 썼으니 감정몰입을 확실하게 한 듯하다.


작가가 다른 글에서도 감각적 표현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흐르다가도 몇몇 표현은 상당히 에로틱하다.


어쨌던지 <2> 작가의  대부분 글에 달린 댓글엔 칭찬 일색이었고,  심지어는 최고의 작가라며 극찬하느는 열혈 댓글로 칭찬하고 있었다. 댓글 다는 사람들이 칭찬 경쟁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라 객관적으로 보는 나는 떱떠름한 느낌이었다.


내가 <2>작가 글을 보고 불편함을 느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일 수 있겠으나 그 여러 번의 불쾌한 부분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볼 참이다.


한 예로 그 작가는
<남과 여> 를 서술하다가
갑자기
영화 <연인>을 거론했다.

주인공  홍콩 배우 이름 양가휘를
본문에는 왕가휘로 썼다.

그 글을 보고
어느 분이  댓글을 달았다.
 
그는
글쓴이가 왕가휘라 했으니
필시 왕가위 감독이겠지! 생각했는지
양가휘 대신

감독 왕가위 이름과 함께 뜬금없이
<화양연화>를 언급했다.


어쩌면 좋은가!
양가휘는 배우고,
왕가위는 감독인 것을!

우스개 소리로 컨닝할 때
로댕이 오뎅이 되는 것이
연상되었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이런 상황을  인지하지 못 한 채
댓글 칭창만 하고 있었다.


글을 제대로 읽고
라이킷과 댓글을 단다면
이 정도 실수를
금세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냥 아는 사람 글이니  라이킷 누르고
칭찬하기의 전형이다.

아무쪼록 이 글이 나간 후엔
수정이 되었길!





사실 오래전부터 내게 있어
<Un homme et Une Femme>은

<흑백 시화집>
혹은 한 편의 <영상 음악> 같은 이미지로 자리했다.

그렇게 많이 봤는데
바람결에 흩날리는
아누크 에메 의 머리결,
그녀의 슬픔 밴 눈망울,
자동차 안에서 앉아있는 두 사람 모습

슬라이드가
 찰크닥 찰그닥 돌아갈 때마다
스크린에 도드라지며
아련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기억의 향연으로 머물러 있다.


ARTE 방송에서
매년 여러 차례 방영해서
장면 장면이 슬라이드처럼 각인되었다.
 
제작된 지 60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세련미와 고귀함을
지닌 영화다.

이미지 엽서
혹은 흑백 그림 모음집처럼
음영 깊은 판화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프란시스 레이라고 부르는 작곡가의  <남과 여> 영화음악은 내겐  늘 노르망디와 바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OST로 사랑받아왔다.


어쨌거나 <2> 작가는 <남과 여>침대 장면묘사하며 침대 시트 소리와 함께 장(장 루이 트랭티냥)이 안느(아누크 애매)에게 묻는 "Pourquoi?(Why)"다.


영화 속 쟝과 안느는 둘 다 배우자와 사별했으므로 얼마든지 사랑해도 문제가 없겠으나 사람의 감정이란 그렇게 사회통념상 되고, 안 되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세상을 떠난 남편을 떠올리며 그에 대한 죄책감이랄까, 처음 만난 남자와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제어한다.


안느(아누크 에메)가 열띤 몸짓을 멈추는 순간 감정과 감각에 몰입해 있던 남자는 여자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혹스러워 Pourquoi(Why)?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내게 <남과 여>의 인상적인 장면은

아누크 에메의 슬픔과 미소가 어우러진 미묘한 표정과

바람결에 머리를 쓸어 올리거나

섬세하고 우아한 동작들이다.

담배에 불붙일 때 코트로 바람을 막아주는 장면,

달리는 차 안에서 침묵하는 두 사람의 표정 변화,

이따금씩 주고받는 대화나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음울하면서도 매혹적인 속삭임,

프란시스 레의 음악과 함께

그 자체가 그림이고 시로 기억된다.


 <남과 여>에 장과 안느가 침대위에서 사랑 나누는 장면을 묘사하며 본인 얼굴도 붉어진다고 하던 <2> 작가는 사랑의 느낌에 대해 <연인>을 소환했다. 소녀 제인 마치를 기다리는 양가휘의 손가락의 떨림이 기억나는 사랑의 장면이라고 했다.



한때 나 역시
감각적인 느낌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저리고
아리기도 하고
때론 사랑하는
 사람 눈빛이나
숨결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마음 저려오는 느낌을
시로 쓰기도 했었다.


문제는 그런 내게 마르그뤼트 뒤라스 <연인>은 전혀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방송 글을 쓰던 친구들과 영화<연인>을 봤는데 보는 내내 그랬고, 보고 나서도 기분이 찝찝했다. 지금 생각해도 프랑스 여학생과 부유한 동양 남자의 일탈 정도로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


뒤라스의 <L'Amant(연인)>은  자전적 소설이고, 끌로드 베리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음사에서 번역 출판했다.


 Amant 이란 단어는 연인이라기보다는 드러내 놓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다. 이 책 표지에 나온 한자어가 '연인'보다  본뜻에 가깝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과 느낌이 다르겠으나 나는 그때 그 영화를 보면서 혹은 보고 나서도 역겨움 같은 걸 느꼈었다.


음울한 베트남 거리와 천장에 달린 크디큰 환풍기 돌아가는 호텔에서 이뤄지는 미성년 소녀와  성년 남자와의 향기롭지 못한 관계!


차 안에서 교복 입은 여학생(제인 마치)을 기다리거나  혹은 함께 앉았을 때 남자(홍콩 배우 양가휘)의 표정과 위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라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사랑의 떨림이 아닌  불쾌감으로 전해져 왔다.


끌로드 베리 감독 영화 <L'Amant> 포스터( 마르그리뜨 뒤라스 소설) / 제인 마치, 홍콩 배우 양가휘


그때 나는 20대였다. 당연히 미혼이었으며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감성과 감각이 충만해 있을 때였고, 그리움과 사랑에 대한 밀도가 최대치였는데도 뭔가 불쾌했다.


물론 나도 사랑에 관해서는 그 느낌과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눈빛이나 그리움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이 저리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연주만 들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워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감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영화를 보고 나올 때 감정은 불편했다 지금 생각해도 음울하고, 마치 젖은 옷을 걸친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축축함 배어있는 베트남의 여름밤 기운과 함께 영화에서 느껴지던 비정상적인 관계들이 사랑이라는 느낌과는 매우 거리가 먼 그런 것이었다.


소설가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  열여섯이 채 안 된 소녀가 느끼는 감정들, 또래와의 설레는 사랑이 아닌 성인 남자와의 원초적 교감, 거기서 오는 상실감과 고통에 가까운 이별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넉넉지 못하고 화목하지도 않은 집, 암울한 상황에서 30대 성인 남자와 치르는 위험한 만남과 일방적인 이별 그다지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는 기억이었다.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성장기에 일탈이라고 뒤라스도 추억하면서 글을 썼다. 내 책꽂이에 뒤라스의 두툼한 책들이 있다 해도 손이 잘 가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남과 여>로 돌아와서 좀 더 이야기해볼까 한다.


 2019년에 제작된 <남과 여>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주인공 쟝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만 그의 마음에 살아 움직이는 안느만을 기억한다.


그런 그를 찾는 안느! 장은 현재의 안느를 인지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그리움으로 살아있는 예전 안느에 대해 현재의 안느에게 말해준다. 


알츠하이머의 특징은 현재 것은 잘 기억 못 하지만 래전 아주 행복했던 순간이나 사랑했던 사람은 신기하게도 또렷이 정확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면 감독 끌로드 를루슈와 절친이었던 여성 배우 아니 지라르도는 프랑스에선 명배우로 손꼽히는 정통 연극공부를 한 예술가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알츠하이머로 큰 충격을 받고 투병하다 2011년 80세에 세상을 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끌로드 를루슈나 미카엘 하네케 감독에게 큰 울림으로 전해져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브런치 두 작가가 <아무~흐>에 대해 감상평을 썼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기에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느낌이나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아무~흐>란 프랑스 영화, 대사도 배경 음악도 거의 없고, 재미있거나 흥미진진하거나 자극적이거나 서스펜스 한 장면 하나 없음에도 며칠 간격으로 두 작가가 같은 소재로 다룰 정도라니 놀랍다.


마무리할 시간이다. <아무~흐>에서는 주인공 조르쥬가 뇌졸중과 치매를 앓고 거동이 불편해진 안느를 그가 사랑하는 방식대로 편안하게 해 준다. 어쩌면 그건 그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깊은 배려 그리고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옳고 틀리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그들 사랑의 방식이므로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다. 종교적인 의미로 판단하고 싶지도 않다. <Amour>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영화,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하고 우리가 겪게 될 노년의 일상을 다룬 영화이다.


다소 무겁고 지루한 느낌마저 드는 영화일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풀어내야 숙제다. 나는 <아무~흐>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충분히 무르익은 생각을 후에 쓰기 위해 작가 노트에 잘 저장해 두었다. 







영화 세 편을 통해 오랫동안 잠재워 두었던 사랑의 감정, 감각적인 느낌들 한때 사랑하는 모든 것 때문에 가슴 저려하며 애태우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두서없이 쓴 글을 접는다.


대학 시절 신문로와 광화문을 산책하고 경복궁과 사간동 근처에 있던 프랑스 문화원을 찾던 날들이 오롯이 떠오른다. 문화원에서 그때는 무척이나 난해하게 느껴졌던 프랑스영화를 보면서 의미를 해석하고 영화음악을 었었다.


시간은 그렇게 사라졌으나 그 어느 시기보다 학과 예술에 대해 열정을 지녔던 내 젊은 날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분께 Hommage를!!! 

 





       

강문정출간작가


      시인 작가 에세이스트. 시집 <양철가슴> 역사 문화에세이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 펴냄. 브런치북<감동 가득한 사람이야기><여행산책>발행, 따뜻한 마음 환한 빛 담은 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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