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오후, 가을하늘이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다. 그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앨버트 하몬드가 부른 <For the peace of all mankind>였다.
~ You turned me on ~
아! 귀에 익은 멜로디와 가슴 저린 가사에 그만 하늘을 올려다봤다. 먼 하늘처럼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 날들을 함께 했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가족들, 친구들, 선생님들, 심지어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남학생까지도.
대학 1학년 때였던가. 건축을 전공한다던 그는 약간 마른 체형에 키가 크고 안경을 낀 청년이었다. 그 시절 대학생들이 유행처럼 보내던 학보(대학신문)를 받으며 몇 번인가 만났다. 어느 날 문득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For the peace of all mankind.” 라는 노래를 시처럼 읊었다. 그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처음엔 당황하다 이내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는 내가 웃자 머쓱해하면서 중간에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만나야 해요. 인류의 평화를 위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노래 가사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단지 ‘인류 평화를 위해’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그는 내게 연인이 되자고 고백한 것이다. 그는 내 눈빛과 태도에서 내가 그를 이성으로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허탈하고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처럼 해맑은 스무 살 청년이 사랑이란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건데, 나는 그가 원하는 사랑을 할 준비도, 그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다. 대학생활이나 서로 다른 전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를 바랐던 나와 달리 그는 내게 연인이 되길 원했기 때문에 점점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으므로 만남은 당연히 오래갈 수 없었다. 그 일 이후에도 그는 정기적으로 학보를 보내다가 어느 때인가부터 그것마저도 보내지 않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어느 해 가을 프랑스 빠리 생 제르맹 데 프레 거리, 카페 드 플로어(DE FLORE)
## 등불 /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
내 어머니는 형제들 중에 막내딸이라서 내 사촌들은 나보다 열살에서 열 서너살 이상 나이가 많다. 내가 초등학교 1~2학년일 때 사촌 언니 오빠들은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들이었다. 그 중 비교적 가깝게 살았던 이모댁에 놀러갈 때면 늘 신나고 흥미진진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오빠 방에는 LP 레코드와 팝송에 관한 진귀한 것들이 많았다 지금은 대중에게 아스라이 멀어져간 추억의 팝송들이지만 모든 것이 어린 내겐 신기했고, 뜻은 모른다해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멜로디와 멋진 기타 연주에 잘 읽을 줄도 모르는 영어 가사를 소리나는 대로 적어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C.C.R(클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블)의 <Who will stop the rain?>은 초등학교 4학년때 처음 듣고 따라 불렀는데, 내가 그 노래를 부를 즈음 그 그룹은 오래 전에 해체된 상태였다. 이모댁에서 들었던 노래들 대부분이 그랬다. 곡을 발표한 지 시간이 많이 지나 이미 해체되었거나 가수들 모습이 놀랄만큼 많이 변한 상태!
E.L.O(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 <Rain is falling>, 퀸의 <Love of my life>, Rainbow <Rainbow eyes>, 제퍼슨 스타쉽의 <Count on me>, New Trolls <Adagio>, <Run and Run>, 비틀즈 <Yesterday>, 이글즈 77년 공연 실황 때 돈 펠더와 조 월시의 환상적인 기타연주가 압권인 <Hotel California>, 테리 잭스의 <Seasons in the sun>, 사이먼 앤 가펑클<scaborough fair> 등은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고, 그때 들었던 노래들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귀한 보물'로 함께 한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나는 언니 오빠들 덕분에 또래 친구들보다 팝송과 포크송을 '잘 아는 전문가~'수준(친구들이 인정한~)이었다. 기회가 되면 내가 섭렵한 <그시절 팝송>의 계보를 정리해볼 참이다.
아무튼 <인류의 평화를 위해>를 들으며 문득 4월과 5월이 부른 <등불>과 미국 듀엣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가 떠올랐다. 재미있는 것은 나는 4월과 5월이 노래부른 모습을 직접 본 적 없지만 그들이 부른 곡들을 좋아한다. 그들 노래 역시 언니들이 즐겨해서 알게 된 것이다.
두 곡 다 가사가 모든 사랑을 포용하고 있고, 이성간의 사랑을 넘어서 인류애까지 함축하고 있다. 부드럽고 온화한 멜로디에 감미로운 목소리로 부르지만 그 안엔 분명 혼탁한 세상을 맑게 정화시켜주는 듯한 신비한 힘이 있다.
프랑스 빠리, 콩시에르쥬리 근처 저녁나절 풍경
등불 / 4월과 5월
비오는 저녁 홀로 일어나
창밖을 보니 구름 사이로
푸른 빛을 보이는
내 하나 밖에 없는 등불이
외로운 나의 벗을 삼으니
축복받게 하소서
희망의 빛을 항상 볼 수 있도록
내게 행운을 내리소서
넓고 외로운 세상에서
길고 어둔 여행길
너와 나누리
하나의 꽃을 만나기 위해
긴긴 밤들을
보람되도록 우리 두사람은
저 험한 세상 등불이 되리.
사이먼 & 가펑클이 노래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가사는 원문과 번역을 함께 실어야 해서 생략하지만 가사를 음미하며 들으면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인다. 예전 노래들은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인류와 세상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에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와 같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빠리 고즈넉하게 홀로 주위를 밝히는 등대같은 조명등
### 우리는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난 날이 강물처럼 우주 어디론가 흘러가듯이 앨버트 하몬드가 애절하게 부르는 “For the peace! For the peace! For the peace of all mankind.”의 노래도 가을바람 속에 흐느적거렸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저를 만나 주세요!”라고 말하던 순수한 청년의 말이 노래 후렴구에 살며시 스며들었다. 글쎄, 지금 그는 인류의 평화를 위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인류 평화를 위해 그는 사랑을 찾아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이렇게 되뇌는 나는 과연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인류까지는 아닐지라도 내 나라, 내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각만 깊어질 뿐이다.
프랑스 빠리 해지는 풍경! 세느 강이 노르망디 대서양으로 흐르는 시간 서쪽하늘엔 노을이 잦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