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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문정 Nov 14. 2021

엔디미온의 잠 속으로 1

날마다 꿈을 꾼다. 현실이 힘들수록 꿈은 길어진다. 고대 신화의 잘 생긴 청년 엔디미온도 영원의 잠에 잠긴 채 꿈을 꾸고 싶다는 소원을 제우스에게 간청했으니 어느 시대에 살건 현실은 늘 고통을 동반하는 것인 듯하다. 그렇기에 시인이나 소설가뿐 아니라 많은 화가와 음악가들이 현실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포용력 있는 꿈이라는 세계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드러낸 것일 테고,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꿈길/김소월


물 구슬의 봄 새벽

아득한 길 하늘이며 들 사이에 넓은 숲

젖은 향기 불긋한 잎 위의 길

실그물의 바람 비쳐 젖은 숲

나는 걸어가노라

이러한 밤 저녁의  그늘진 그대의 꿈

흔들리는 다리 위 무지개 길

바람조차 가을 봄 걷히는 꿈



꿈 / 황진이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에는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꿈길 따라 그 님을 만나러 가니

길 떠났네. 그 님은 나를 찾으러

밤마다 어긋나는 꿈일 양이면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가을밤의 꿈 / 한용운


가을밤 빗소리에 놀라 깨니 꿈이로다.

오셨던 님 간 곳 없고 등잔불만 흐리구나

그 꿈을 또 꾸라 한들 잠 못 이뤄 하노라.


야속타 그 빗소리 공연히 꿈을 깨워

님의 손길 어디 가고 이불귀만 잡았는가

베개 위 눈물 흔적 씻어 무삼하리요


꿈이어든 깨지 말자 백번이나 다짐했건만

꿈 깨자 님 보내니 허망할 손 맹세로다

이후는 꿈은 깰 지라도 잡은 손은 안 놓으리라.


님의 발자취에 놀라 깨어 내다보니

달그림자 기운 뜰에 오동잎이 떨어졌다

바람아 어디가 못 불어서 님 없는 집에 부느냐.



꿈 / 강문정


들이며 산이며 안개 기둥처럼 부옇게 솟아올라

잠에서 깨지 않은 채  서로 엉켜 하나 된 시간

호수 빛 바람 찬 대기로 흐르고 바다 위 떠있는

섬처럼 알프스 순백의 몽블랑처럼 솟은 봉우리

그 위에서 나는 혼자였다 내가 머물 곳도 함께

할 누구도 없었지만 두려움도 외로움도 없었다


손 뻗치면 하늘과 닿을 것 같던 그 높은 곳에서

내 안 이기심과 위선의 주머니들을 벗어던진 후

뛰어내린 그 순간 무중력 상태와 같은 큰 힘이

받쳐주는 느낌으로 산뜻 떠오를 수 있었던 비행

들이며 산이며 온 세상에 안개기둥 부옇게 솟아

세상 하나 된 찰나 우주의 편린으로 날아올랐다



서정적인 느낌이 시 전체에 흐르는 김소월 시인의 <꿈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황진이의 <꿈>과 한용운 시인의 <가을밤의 꿈>이다. 꿈을 매개로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혹은 그 곁에 머무르고 싶지만, 꿈에서조차 이루지 못하는 사랑이므로 그리움은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 분야에서도 꿈을 소재로 한 작품은 적지 않다. 쇼팽이나 멘델스존도 꿈을 소재로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불멸의 곡을 작곡했고, 샤갈이나 후안 미로와 같은 미술계의 거장들 역시 자신들의 열정을 환상적인 꿈의 세계로 표현해서 관람객들에게 감동과 감흥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시인은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기에 꿈에서 깨어나 이 세계에 머물러야 한다. 내가 꿈을 꾸는 그 순간에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괴로워하며 죽어가는 사람들과 동물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나는 깊이 잠들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시를 쓴다. 자신을 드러내기에 급급한 세상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생명 있는 것들을 지켜보며 글을 쓴다. 아울러 내가 속해 있는 곳, 나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내 시들은 한 행 한 행 내 기억들과 내가 보고 느끼는 사실에 대해 조심스럽게 풀어놓고, 정성스럽게 다듬은 마음의 결정체라고 감히 고백하고 싶다. 나는 내 글이 유행을 따라 겉도는 언어의 유희가 아닌 것, 사치스럽지 않은 것, 비록 투박할 지라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기를 바란다. 비록 꿈같은 바람을 갖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나는 내 시나 글을 읽는 분들에게 내 마음의 일부라도 전달되어 서로 감싸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랑 흐르는 세상이 되길 간절히 꿈꾼다.


“문학이란 가장 소박하고 유약한 영혼들조차 맞아들이는 터전, 행복한 아나키즘이 펼쳐질 수 있는 특권적 터전이며, 문학은 현대의 과학기술시대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머무르려는 항거의 한 모습”이라고 하신 불문학자 정명환 선생님의 고견을 가슴에 새기며, 결코 순탄치 않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나는 글을 쓸 것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따뜻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오는 날엔, 내가 그토록 원하던 신비로운 자연을 노래하며 엔디미온의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 것이다.



엔디미온의 잠 속으로 / 강문정


하늘  키  자라  더 푸르러지고

바람  켜켜로  시린 기운  가득

노을빛 닮은 가을 실그물 펼쳐

세상은 바다 비로 옅게 젖는데


시름   푼   녹녹한   가을 저녁

내  잠은 그리움만큼 길어지고

내  잠은 달빛만큼 깊어지리니     

그대  해진 신 벗고 쉴 수 있길


내 꿈속 그대 쉴 작은 집 짓노니

그리운 사람 살며시 그 문 열고

내 잠 속으로 어서 와 누우 시기를

영원의 꿈에 잠긴 엔디미온처럼


겨울  봄  여름  그리고  가을 내내

여린 꿈 꾸는  내 곁에 머무시기를

그리움도 반딧불 그늘에 잠들기를

그 잠 속에 녹아 녹아 깨지 말기를

  

  - 강문정 <양철가슴>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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