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5구에 있는 팡테옹 근처를 지날 때마다 건축물을 설계 완성한 수풀로와 루이 15세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조선 왕조 때 수양대군이 떠오른다. 공식적으로는 세조라 부른다 할지라도 조카인 단종과 사육신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시기의 잔인함을 기억하기에 나는 세조를 수양대군이라 부른다.
팡테옹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 루이 15세(1710-1774) 때 완성된 건축물이다. 루이 15세가 여러 번 중병을 앓다가 “신이시어! 저를 살려주신다면 성전을 봉헌하겠나이다!”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의술이 좋아서 나았는지 병은 나았고 그는 약속대로 쥬느비에브 언덕에 건축가 수풀로로 하여금 현재 팡테옹, 당시에는 쥬느비에브 성당을 짓게 했다는 이야기다.
파리 라틴구 쥬느비에브 언덕에 높이 세워진 팡테옹
이런 내용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수없이 많이 전해 내려오는데, 유독 수양대군이 떠오르는 건 이야기가 썩 믿음이 가지 않아서도 그렇고, 루이 15세나 수양대군이 그다지 옳은 일을 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공통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기록된 사실이니 믿을 수밖에는.
세조라 불리는 수양대군은 알려진 바와 같이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충신 김종서, 황보인을 처참하게 살해한 후, 1455년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이에 격분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은 세조로 즉위한 수양대군을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결국은 처형당했다.
그들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모두 처형하고 그들 가족 중 여자들과 식솔들은 노비나 관비로 보냈으며, 삼족을 멸하기까지 했다. 그때 처형당한 여섯 명의 충신을 사육신이라 하고 살아서 끝까지 수양대군에게 저항한 생육신은 김시습, 이맹전, 남효온, 조려, 성담수, 원호다.
수양대군은 단종(1441-1457)을 강원도 영월로 귀양 보내고 그것마저도 불안했는지 사약을 마시게 하는 명령을 내렸다. 권력에 눈이 멀면 형제도 조카도, 양심도, 신뢰도 버리게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문종 아들 단종은 불과 만 열한 살에 왕위에 올랐다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 세력에 의해 폐위당하고 멀고도 먼 영월로 유배되었다. 결국 단종은 1457년 만 열여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단종의 능인 장릉과 단종 유배지임을 일러주는 정자각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강원도 영월 청량포 단종 어소
세조가 아무리 정치를 잘했다 하더라도 그가 했던 일은 역사의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친 조카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영원히 권력을 쥐고 살 것 같던 수양대군 역시 지병과 창병으로 고통받았다.
왕 일행이 충북 보은으로 요양을 가던 중에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가는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려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상황에 소나무가 가지를 들어 올려 왕 행렬이 지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에 감동한 수양대군은 소나무에게 정 2품이란 큰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다.
세조가 벼슬을 내린 정 2품 소나무
글쎄, 루이 15세 이야기도 세조 이야기도 기록에 있는 일이니 믿어야 하겠지만 이런 이야기보다 더 가슴에 와닿는 건 왕방연이 지은 시 한 수다.
왕방연은 당시 금부도사로서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갈 때, 단종을 호송한 인물이다. 그는 맡은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신분이었겠으나, 가슴은 무척 아팠고 깊이 괴로워했음이 분명하다. 사육신이나 생육신 같이 수양대군의 그릇된 행동에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왕방연 같은 심정으로 그저 묵묵히 살았을 뿐일 테니까 말이다.
5백여 년 전 강원도 영월로 가는 길이 오죽이나 험난 했겠는가? 고적하고 척박한 유배지에 어린 상왕을 두고 오는 그 마음 또한 연민과 갈등으로 심란했을 것이다. 그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고운 임 여의옵고>는 중학생이던 나를 눈물 흘리게 한 시이기도 하다.
고운 임 여의옵고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달도 내 마음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머나먼 오지에 어린 단종을 두고 돌아오는 마음이 얼마나 시렸을까? 고적한 밤, 하염없이 홀로 냇가에 앉아 시를 읊었을 왕방연의 모습을 그려본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힘없이 유배지에 남겨진 단종에게 죄스러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단종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힘이 될 수도 없는 유약한 자신을 한없이 원망하면서 그 괴로운 심정을 물과 달에 비유했다. 흐르는 물도, 밤하늘에 떠 있는 달도 자신처럼 서럽게 밤길을 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청령포 건너 강가 소나무 아래 서있는 왕방연 시조비
그 시점에서 불과 65년 전 이방원과 정몽주가 읊었던 시조 <하여가>와 <단심가>는 왕방연이 지은 <고운 임 여의옵고>보다는 훨씬 정치색이 짙다.
이방원(1367-1422)은 조선왕조를 연 이성계(1335-1408) 아들로 훗날 태종이 되었으며, 정몽주(1337-1392)는 고려 말기 성리학자며 정치가다. 정몽주와 이성계는 기울어가는 고려를 일으키고 낡고 부패한 정치를 쇄신하겠다는 뜻을 함께 해서 창왕을 폐위하고는 공양왕을 추대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열어 스스로 왕이 되려는 것을 알고 실망한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지키겠다고 결심한 후 이성계와 길을 달리 할 것을 결심했다.
1392년 정몽주가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갔을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면서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은 <하여가>로 정몽주 마음을 알아보려 했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 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자신의 뜻을 확고히 전했다.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결국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뜻을 보이자 이방원은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하라 지시하고 이후에 역모를 했다는 이유로 시신을 효수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무참히 죽였지만 그 충절은 인정했는지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후 1405년에 고인이 된 정몽주에게 영의정 벼슬과 문충이란 시호를 내렸다.
세상에는 정몽주처럼 굳은 절개와 용기로써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충절을 지키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그를 죽인 이방원까지도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던 게다. 하지만 유사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왕방연 심정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비록 세조 치하에서 맡은 임무를 수행했지만, 단종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갈등하고 괴로워한 것처럼 말이다. 왕방연은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금부도사라는 직책 때문에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내린 사약까지 가져가야 했으나 차마 단종에게 그 명을 전할 수 없어 울기만 했었다. 어이없게도 단종은 욕심에 눈먼 하인에게 목이 졸려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은 직후, 왕방연은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가책과 절망감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며 죽는 날까지 단종을 기렸다.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단종을 유배지로 호송하지 않고 환상적으로 구출해 내는 멋진 모험을 했겠지만, 왕방연은 그저 보통 사람인지라 그런 용기는 없었을 것이다. 영웅도 협객도 아닌 그는 연민과 갈등을 느꼈을 거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번민했을 테니까. 그래서 왕방연의 <고운 임 여의옵고>가 내게는 더욱 애절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