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회색공간에 서 있었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없는 곳. 오직 희미한 안개와 거대한문 하나만이 존재했다. 문을 열어보니, 남색 저고리를 입고 있는 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길게 땋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 마치 오랫동안 이 자리에 앉아있었던 사람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이봄님 저는 심판관 바리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심판관이라 소개하며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앞에 커다란 황금 저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의 접시는 미묘하게 흔들리며 균형을 잡고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입니까?"
"여기는 이승과 저승의 사이, 초월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봄님은 이 저울의 저울질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됩니다."
"제가 죽었단 말이에요?"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무언가에 의해 끌려온 것도,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잠깐 눈을 떴을 뿐인데, 인생의 최종 심판대 앞에 서있었다.
"이봄님 진정하세요. 원래 죽음은 갑자기 찾아옵니다. 원해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녀는 저울 한쪽에 투명한 구슬을 올려놓았다. 이구슬은 내 인생의 선행을 상징한다고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가족을 위해 성실히 일했던 시간들 누군가에게 건넸던 사소한 친절들이 차곡차곡 담겨있었다.
저울이 천국 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나는 안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반대편에 또 다른 구슬들을 얹기 시작했다. 바로 검은 구슬 이것은 죄를 상징한다고 했다. 내가 무심코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 말들, 외면했던 타인의 고통, 두려움에 침묵했던 순간들...
접시가 천천히 지옥 쪽으로 기울더니 수평에서 멈췼다.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저기 바리 씨 이건 무슨 뜻이죠?"
"이건 당신의 선과 악의 무게가 정확히 같다는 뜻입니다. 실은 저도 수백 년 만에 처음 보는 균형입니다."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저울을 바라봤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선과 악이 같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나는 착한 사람이었을까, 나쁜 사람이었을까. 그 어느 쪽도 확신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한숨을 쉬어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건 초월규정에 없는 경우인데... 천국도 지옥도 정할 수 없는 경우라..."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신이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스스로 졸아보아야 합니다. 결국 당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당신 즉 자신이니까."
나는 저울을 바라봤다. 양쪽 접시는 여전히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나의 삶 전체가 망설임 위에 세워진 성처럼.
그때 문득, 죽기 전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비 오는 밤, 횡단보도 앞에 서있던 한 노인. 우산 없이 떨고 있던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지만 이내 지하철 시간에 쫓겨 등을 돌렸다. 사소한 순간 어쩌면 그것이 선과 죄의 무게를 좌지우지하는 결정타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스스로 물으세요.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가야 마땅합니까?"
나는 망설였다. 저울은 아무 소리 없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천국과 지옥, 선과 악, 선택과 망설임. 모든 경계가 무너지고, 오직 그사이에 내가 껴있을 뿐이었다. 저 멀리 천국과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 동시에 열렸다. 바라는 마지막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삶의 저울은 오직 당신만이 기울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 갈래길에서 계속 고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