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로 전해지는 마음

by 따심토

가을빛이 스며든 캠퍼스 잔디밭. 지아는 두꺼운 소설 책 한 권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책 속에 몰입하다 보면 사람들의 속내가 희미하게 스며드는 듯한 기묘한 순간이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지아는 책 속 문장이 남의 마음과 이어져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책을 읽을수록, 누군가의 마음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독서가 쌓여 만든 또 다른 감각처럼.
그녀는 이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훔쳐본다는 건 달콤하면서도 죄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사람 앞에만 서면 그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바로 같은 학과 동기, 호영이었다.
지아는 그 사실이 오히려 불편했다. 남의 마음을 읽어 대화를 맞추는 게 이제는 익숙해졌는데, 호영과 있을 땐 늘 어색한 틈이 생겼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그래서 더 궁금했다. "왜 이 사람만은 마음이 읽히지 않을까?"
...
호영은 오래전부터 지아를 눈여겨봤다. 신입생 환영회 때 그녀가 무대에 올라 짧은 자작시를 낭독했을 때,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또박또박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책 속에서 길을 잃고, 또 길을 찾는다”라고 말하던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많은 신입생들 가운데 유독 지아만이 ‘글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글자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낯설고 매혹적이었다.
그래서일까. 같은 조로 배정된 창작 워크숍 시간에 호영은 자꾸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색하게 웃고는 다른 말로 돌려버렸다.
“오늘 발표한 글, 진짜 좋았어요.”
“아, 고마워요. 근데 제 글은 좀 허술했죠.”
“아니에요. 오히려 솔직해서 더 좋았어요.”
지아는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혼란스러웠다. 호영의 진심을 읽으려 애써봤지만, 맑은 유리창처럼 비어 있는 공백만 느껴졌다.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건, 그녀에게 있어 낯설고 무서운 일이었다.
어느 늦은 오후, 두 사람은 도서관 앞 벤치에서 마주 앉았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 속, 지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호영 씨는… 글 쓰는 것 좋아하세요?”
호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사실, 저는 글을 잘 쓰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읽은 한 단편소설 때문에…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라고. 짧은 이야기인데, 내 마음을 완전히 흔들었어요. 그리고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죠.”
지아는 그 말을 듣고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호영의 마음이 또렷하게 읽히지 않아서 더 진심 같았다.
“…그럼 지금도 글로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고 싶어요?”
“네. 특히, 당신의 마음을.”
지아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귀 끝이 붉게 물든 호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의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다. 지아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읽을 수 없던 마음이, 드디어 직접 들려온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자주 캠퍼스를 함께 걸었다. 강의가 끝난 뒤 잔디밭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학과 카페에서 과제를 하다 함께 밤을 새우기도 했다.
호영은 늘 서툴렀다. 지아의 이름을 부르다가 괜히 말을 흐리거나, 별 의미 없는 농담을 던졌다가 혼자 당황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서툼 속에서 지아는 묘한 따뜻함을 느꼈다. 상대의 마음을 읽지 않아도, 그의 진심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왔으니까.
지아는 점점 깨달았다. 마음을 읽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건, 누군가가 용기 내어 직접 건네는 말이라는 걸. 공감은 누군가의 입술에서 떨리며 흘러나올 때 가장 진짜가 된다는 걸.

어느 저녁, 해 질 녘의 캠퍼스 길. 두 사람은 붉은 노을빛에 물든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호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지아 씨. 당신이 남의 마음을 잘 읽는 사람이라는 건 알겠어요. 근데… 내 마음은 직접 말해주고 싶어요.”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또박또박 말했다.
“좋아해요. 당신이 글 속에서 길을 찾는 모습도, 글 밖에서 헤매는 모습도, 그저 다 좋습니다..”
그제야 알았다. 읽히지 않던 공백은 텅 빈 게 아니라, 호영이 스스로 채워 넣기를 기다리고 있던 자리였다는 걸.
그날 밤, 지아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수많은 책을 읽으며 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내 마음은 책 속에만 가두어 두었다. 그런데 오늘, 한 사람이 그 마음을 불러내 주었다. 마음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진짜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 한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지아는 조용히 일기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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