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nter

무채색이어도 괜찮아.

by 따심토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였다.
그 위에는 80억 개의 색이 존재했고, 사람들은 태어날 때 각자의 색을 지니고 세상에 내려왔다.
붉은색을 가진 이는 열정으로 세상을 물들였고,
푸른색을 가진 이는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노란색을 가진 이는 햇살처럼 웃으며 주위를 환히 밝혔다.
그렇게 모든 이는 자신만의 색으로 세상을 그려갔다.
그러나, 예진에게는 색이 없었다.
그녀는 ‘무채색’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안타까워하거나, 때로는 조롱했다.
“색이 없다니, 평생 칙칙하겠군.”
“쓸모없는 색이 무슨 그림을 완성할 수 있겠어?”
그러나 부모는 말했다.
“무채색이라도 괜찮아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색이니까요.”
예진은 그 말을 믿으며 자랐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단단해지고, 그녀의 붓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녀가 그린 그림은 언제나 탁하고, 명도와 채도가 사라진 회색빛이었다.
노력해도, 잠을 줄여가며 연습해도,
그림은 여전히 죽은 듯했다.
“왜 나만 안 돼?”
그녀는 그 말을 수없이 중얼거리며 붓을 내려놓았다.
‘이제 현실을 봐야 해.’
‘곧 어른이 되니까, 꿈 따위는 접어야 해.’
예진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그림을 포기했다.
붓은 굳고, 팔레트의 물감은 말라붙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예진은 하얀 붓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저건… 아무 색도 안 나오는 붓이잖아?’
그녀는 다가가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해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잖아요.”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새롭게 태어나는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이미 그려진 선 위에 다른 선을 그을 순 있어.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아닐까?”
예진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림은 ‘완성되지 못한 실패’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남자는 예진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그는 언제나 흰 붓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지 않아도, 색이 나타나지 않아도, 그는 즐겁게 붓을 움직였다.
“기억해. 네가 처음 붓을 들었을 때의 마음을.”
“서툴고 어설펐지만, 그때 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었잖아.”
그 말에 예진은 다시 붓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그림에는 색이 없었다.
좌절은 다시 밀려왔고, 예진은 속삭였다.
“결국 나는 변하지 않아. 나는 무채색이야.”
남자는 미소 지었다.
“무채색이란, 모든 색을 품은 색이야.”
며칠 후, 남자는 예진을 ‘캔버스 공원’으로 데려갔다.
거대한 흰 천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붉은 이, 푸른 이, 노란 이… 그리고 서로 다른 색이 맞닿으며 새로운 색을 만들어냈다.
“봐, 예진.
이 세상은 혼자 그리는 그림이 아니야.
누군가의 색이 다른 색과 만나야 비로소 완성되지.”
예진은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무채색인 자신은 늘 ‘없음’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모든 색이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이었다.
그녀는 공원 한가운데 서서 붓을 들었다.
흰 붓끝에서 은은한 빛이 번져 나갔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지만, 곧 사람들의 그림과 섞이며 무채색은 새로운 빛을 만들어냈다.
남자는 말했다.
“정답은 없어.
하지만 너의 색이 없다면, 이 그림은 완성되지 않아.”
그날 이후, 예진은 매일 공원으로 나갔다.
누군가는 밝게, 누군가는 어둡게,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색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예진은 언제나 흰 붓을 들고,
사람들의 색이 서로 섞일 수 있도록 ‘빈 여백’을 그려주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의 색은 ‘없음’이 아니라 ‘모두를 이어주는 공간’이었다는 것을.
세상은 여전히 80억 개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채색의 붓질이 있었다.
그 덕분에 모든 색은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었다.
예진은 오늘도 흰 캔버스 앞에 섰다.
“이제야 알겠어.
내가 그리던 그림은,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그림이었어.”
그녀는 조용히 붓을 들었다.
다시 시작되는 또 하나의 선.
그 위에, 세상 모든 색이 숨 쉬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푸른 것은 기억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