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의 향기

by 따심토

한양의 궁궐 안, 한쪽 서고에는 잔잔한 향이 감돌았다. 책장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면 먼지가 금빛으로 부유했고, 오래된 종이 냄새 속엔 묘한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곳은 집현전 학사들이 모여 새로 창제된 한글 서책들을 필사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임금의 명으로 완성된 『용비어천가』와 『동국정운』이 책장마다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먹물의 향기 속에서, 학사들은 글씨를 쓰고 다듬으며 새 문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붓을 한 번 찍을 때마다 종이 위에 먹물이 스며들며, 글자가 마치 숨을 쉬는 듯 피어났다. 그날도 도현은 조심스레 붓을 들어 글자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집현전의 젊은 학사로, 한자와 음운에 밝고 임금의 뜻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려 노력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모임에 낯선 인물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조용한 미소와 단정한 자세를 지닌 궁녀, 운비였다. 운 비는 궁중의 서고에서 문서를 관리하던 궁녀로, 필사 솜씨가 빼어나 임금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독서회에 참석하게 된 이였다. 처음에는 학사들 모두 놀랐다. 궁녀가 학자들과 나란히 앉는다는 건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비가 붓을 드는 순간, 서고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스며드는 먹물은 한 자 한 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서체는 단정하면서도 유려했고, 자음과 모음이 서로를 어루만지듯 이어졌다. 도현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대는 참으로 붓을 곱게 잡는구려. 어디서 익히신 것이오?”운비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웃었다. “저는 한자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주상 전하께서 모든 백성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새 문자를 만들어주셨다 하여, 그 뜻을 헤아려 진심을 다해 썼을 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마음을 글로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그 말에 도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글은 학문이자 권위였으나, 그녀에게 글은 숨결이자 마음이었다.

그날 이후 도현은 운비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훈민정음의 원리와 시의 운율, 한 글자의 뜻이 가진 힘까지 차근히 설명했다. 운비는 귀를 기울이며 배웠고, 도현의 말이 끝날 때마다 눈빛이 반짝였다.

“학사님, 글이란 마음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렇소. 글자는 사람의 뜻을 담는 그릇이니까.”

그렇다면... 글에는 높고 낮음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신분에는 높낮이가 있지만 읽고 느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

그 말은 도현의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지식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던 세상에서, 운비의 생각은 부드럽게 그 질서를 흔들고 있었다. 며칠 후, 도현은 서책 사이에 놓인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얇은 한지에 단아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학사님께, 서고의 바람결이 오늘따라 유난히 잔잔하여 마음이 길게 머물렀습니다. 학사님께서 가르쳐주신 ‘뜻이 곧 글이 되고, 글이 곧 마음이 된다’는 말씀을 되새기며 붓을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배운 것이 적지만, 글은 누구의 허락이 아니라 마음으로 피워 나는 꽃이라 믿습니다. 붓끝에 깃든 향이 언젠가 학사님의 마음에 닿기를 바랍니다. 서고의 향기 속에서, 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편지를 읽은 도현은 한참 동안 붓을 들지 못했다. 운비의 말속엔 배움이 아닌 ‘삶’이 있었다. 그는 서고의 창문을 열고, 묵향과 바람을 한 번에 들이마셨다.”그날 밤, 도현은 답장을 써 내려갔다. “그대의 글을 읽고 서책보다 더 깊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나는 그간 글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학문을 쌓는 것이 옳다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붓끝에서 배운 것은, 글이란 다만 사람을 잇는 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묵향이 가득한 서고 한편에서, 그대의 붓끝이 남긴 온기를 잊지 않겠소.”

...

며칠 뒤, 임금이 직접 독서회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학사들은 긴장했지만, 도현과 운 비는 묵향 속에서 평소처럼 붓을 들었다.

도현은 [월인천강지곡]의 한 구절을 필사하고 있었고, 운 비는 곁에서 조심스럽게 묵을 갈았다.

“학사님, 글은 마음으로 써야 합니다. 사람의 숨결을 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더 귀하지요”

운비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말은 도현의 손 끝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닌 ‘사람을 위한 글’을 써 내려갔다.

잠시 후, 임금이 서고에 들어섰다. 묵향이 가득한 방 안에서 임금은 도현의 필사본을 들어 올렸다. 필사한 글을 들여다본 임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서체는 곱고 단정하구나. 글자마다 마음이 담겼도다. 누가 썼느냐?”도현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전하, 이서체 는 한 궁녀의 말을 본받아 썼습니다. 글이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가 느끼고 나눠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붓을 들었습니다.”임금은 한참 도현을 바라보다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옳다. 그대는 글의 본뜻을 보았도다.”그 순간, 운비의 눈가에 빛이 났다. 그것은 슬픔이 아닌 자신이 품었던 마음이 세상에 닿았다는 안도였다. 도현도 붓끝에서 스며든 마음이 임금의 귀에 닿았음을 알자, 눈가에 고운 눈물이 맺혔다. 서고의 바람은 여전히 잔잔했고, 향기는 오래도록 머물렀다.

며칠 후, 독서회가 끝났다. 도현은 운비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대의 말을 본받아 그때 글을 썼소. 이제 나는 누구를 위해 글을 써야 하는지 알겠소.”

운 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학사님께서 그 마음을 잘 이해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배움이 적지만 학사님 덕분에 이 세상을 더욱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운 비는 환하게 웃었고, 도현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이 남긴 글과 마음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향기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읽고 있었다. 그날 이후 서고는 다시 고요를 찾았다. 책장 사이로 남은 향기는 여전했고, 두 사람의 마음이 스며있었다. 바람이 문틈을 스치면 서고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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