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랑

by 따심토

방 안이 아주 조용해졌다.
수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건혁 씨.”
건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 아버지 핑계로 그림 안 그리고 있는 거예요.”
수리의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말에 건혁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잃은 자신을 못 견디는 거잖아요. 그날 이후로 건혁 씨가 제일 싫은 사람... 누구예요?”
대답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잖아요.”
그 말이 방 안을 가르듯 떨어졌다.
건혁의 숨이 거칠어졌다.
수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것도 힘든데,
거기에 ‘내가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붙여 놓으면 평생 미워해도 되니까요.”
건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게 하면 슬픔이 죄책감으로 바뀌어요.
그리움은 답이 없으니 슬픔은 견디기 힘들잖아요.
근데 죄책감은요, 자기 자신을 벌주면 되거든요.”
건혁의 손이 더 세게 떨렸다.
수리는 그 손을 꽉 잡았다.
“그래서 그림을 안 그리는 거예요. 아버지가 좋아하던 걸, 건혁씨는 일부러 멈춰놓는 거라고요.”
건혁의 숨이 무너졌다.
“왜냐면… 내가 행복해지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흔들리는 건혁의 눈을 수리는 피하지 않았다.
“근데요.”
조용하게 수리가 말했다.
“아버지가 건혁 씨한테 바랐던 게,
같이 멈춰 서 있는 거였을까요?”
건혁은 수리의 눈을 바라봤다.
수리의 눈은 연민도 위로도 아닌 바위처럼 단단했다.
“건혁 씨.”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평생 죄인처럼 사는 거,
그게 과연 건혁씨 아버지가 원한 결말일까요?”
그 질문은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
건혁의 입술이 떨렸다.
“...”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
수리는 그제야 조금 숨을 놓았다.
“이제 그만, 아버지 이름으로 자기 자신 벌주는 거 멈춰요.”
그 말은 부탁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사고로 멈췄어요.”
“건혁씨는 선택으로 멈춰 있는 거예요.
그리고 선택은… 다시 할 수 있어요.”
방 안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수리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건혁 씨가 다시 그리면,
그건 사고를 이기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마지막 선택을 존중하는 거예요.
저도 소중한 누군가를 붙잡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부디 건혁씨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건혁은 순간 하린의 말이 떠올랐다.
'선배, 저는 선배가 행복하면 좋겠어요."
길고, 깊은.
건혁의 손이 연필 위에 내려왔다.
꽉 쥐지는 못했다.
하지만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
고요한 새벽이었다.
창밖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텅 빈 교차로 위로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수리는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소파에 기댄 채 숨을 고르게 있었다.
건혁은 한참 동안
스케치북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필을 쥔 손이 식어가고
손끝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다시 그리면… 또 누군가가—’
생각이 고개를 들려는 순간,
건혁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야.”
이번에는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천천히 고개를 들어
책상 위 액자 속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사진 속 아버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날 횡단보도 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건혁의 목이 조용히 울렸다.
“… 아버지.”
한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저, 아직도 거기 서 있어요.”
숨이 흔들렸다.
“아버지는 건넜는데…
저만 계속 신호 기다리는 척하면서.”
조용한 새벽 공기 속에서
그의 고백은 오히려 담담했다.
“행복해지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눈물과 함께 건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그게 더 비겁한 거겠죠?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했던 아들이
계속 도망치는 게..."
건혁은 연필을 종이 위에 올렸다.
이번에도 손이 떨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끝까지 그었다.
가늘고, 길게.
선이 완성되자
그는 숨을 내쉬었다.
놀랍게도
그 선은 흔들렸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건혁은 낮게 웃었다.
울음 섞인 웃음이었다.
“살아 있네…”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
그 말이 방 안에 남았다.
창밖 신호등은 여전히 초록이었다.
건혁은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
햇빛이 비춘 아침이 찾아오고,
수리가 먼저 눈을 떴다.
소파에 기대서 잔 탓인지 목이 뻐근했다.
수리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방을 둘러보다
수리는 조용히 멈췄다.
책상에 엎드린 채 누워있는 건혁의 손에는 아직 연필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스케치북 위에 선과 면에 조화가 담겨있었다.
이미 그위에는 다른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밝게 미소를 짓었을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건혁이 늦게 책상에서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본 건
새벽에 그어 놓은 선이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다.
'찢어버릴까.'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그 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여기… 망설였지.”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망설였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그날 오후,
건혁은 오랜만에 미대 근처를 걸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자신이 멈춰 있었을 뿐,
세상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체감했다.
게시판 한쪽에
미술 공모전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당신만의 세계를 그려주세요.”
하린이 준 안내서에 적혀있던 문구.
건혁은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시각,
하린은 작업실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찢고 있었다.
스케치 종이였다.
아버지의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딴 취미로는 아무것도 못 된다.”
종이 조각이 흩어졌다.
하린은 잠시 멈췄다.
문득, 건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늘 어딘가 무너질 것 같았던 눈.
그 사람이 혹시 지금도 멈춰 있을까.
하린은 휴대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먼저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그도, 자기 싸움을 하고 있을 테니까.

그때 건혁에게 온 문자를 보고 하린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하린아, 공모전 접수 아직 안 끝났지?"

책상 위 스케치북은 그대로였다.
잠시 서 있다가
의자에 앉았다.
연필을 집었다.
이번에는
어제보다 덜 떨렸다.
선을 하나 더 그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직 형태는 없었다.
의미도 없었다.
그냥 선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횡단보도로 보이지 않았다.
건혁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생각했다.
‘사고는 멈춤이었지만
나는 멈춤을 선택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몇 년이 넘게 걸렸다.
연필이 종이 위를 다시 스쳤다.
창밖 신호등이 바뀌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이번에는
그 소리가 두렵지 않았다.
수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커피 드실래요?”
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작은 아니었다.
하지만 멈춤은 끝났다.

지금은 수리가 갖고 온 커피에 따뜻한 김이 천천히 올라올 뿐이었다.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