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서 있어 준 사람

by 따심토

한때 나는 내 삶이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은 반듯했고, 늘 정답이 먼저 있었다.
건설회사 사장인 아버지는 자신이 세운 건물들처럼 단단하고 과묵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떤 학교에 가야 하는지,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까지 나의 삶을 결정했다.
"하린아, 넌 내 뒤를 이어야 한다. 넌 아빠 딸이잖아.”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 그 말은 격려와 애정처럼 들렸지만
실은 계약서 같은 문장이었다.
시험 성적은 숫자였고, 대화는 하나의 보고였고, 꿈은 무조건 아버지의 계획표 안에 있어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웠다.
싫다는 말 대신, “네.” 가 더 안전했다.
그 한마디면
집안 공기가 조용해졌다.
욕설도,
날카로운 눈빛도,
날아오는 손도
멈췄으니까.
아버지는 늘 바빴고, 늘 단정했고, 늘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이어야지.
이 집도, 이 회사도.”
그 말속에는
“너는 네 인생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말이 적었고,
웃음이 조금 늦게 피는 사람이었지만 늘 나를 보면 웃으셨고,
아버지가 없는 밤이면
엄마는 내 방문을 조심히 두드렸다.
“하린아, 자니?”
나는 자는 척을 그만두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그 품은 따뜻했지만 어딘가 슬펐다.
"괜찮아, 우리 하린."
나는 엄마의 손목에 자주 시선이 갔다.
긴 소매가 여름에도 내려와 있었다.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게 서로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나는 너무 일찍 배웠다.
그림은 우연처럼 다가왔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그리고 싶은 걸 그리세요."라보 말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멍해졌다.
그리고 싶은 것이라니.
나는 그 말 앞에서 멈췄다.
머릿속에 아무 계획도 없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싶은 것이라니.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연필을 들었다.
손이 가는 대로 그렸다.
엉망이었다.
형태도 없고, 의미도 없고,
그냥 흘러가는 선.
그런데 이상하게
숨이 트였다.
그날 이후
나는 몰래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책상 서랍 가장 깊은 곳에 차곡차곡 모아놓았다. 아버지가 모르는 나의 유일한 공간.
아버지가 절대 보지 않을 곳.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나는 “누구의 딸”이 아니었다.
그냥, 나였다.
하지만 들키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게 뭐냐.”
아버지가 스케치북을 넘기면서 내 그림을 보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늘 낮았지만 그날은 더 차가웠고, 그 안에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딴 걸로 시간을 낭비해?"
아버지는 내가 보는 앞에서 스케치북을 찢었고,
내 앞에서 주먹을 휘둘렸다.
"제발 그만하세요."

엄마는 나를 꼭 안으며 아버지의 주먹을 대신 맞았고, 나는 엄마품에서 눈물을 계속 흘렸다.
엄마는 나에게 있어서 최후의 보루였지만 그런 엄마도 내가 중학생 때 가출을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그림을 더 숨겼다.
그리고 조금씩,
웃음도 줄어들었다.
시간은 흘러
나는 명문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내 딸이야.”
아버지 앞에서는 미소를 짓었지만 거울 앞에 서서 내 표정을 봤을 때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날은 그냥, 이상한 날이었다.
입학식날 찍은 사진만 봐도 겉으로는 난 웃고 있었지만 사진 속 내 눈은 비어 보였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친구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에서도 나는 아버지가 준 나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와, 진짜 대단하다."라고 말했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음... 뭐 친구라도 해도 나를 이용하는 놈들 뿐이었으니까.
어느 날
강의가 끝났는데도 집에 가기 싫었다.
비가 오기 직전 공기처럼 이상하게 숨이 막혔었다.
그래서 괜히 발걸음을 돌려
미대 건물 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항상 색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 그림 앞에서 멈췄다.
처음엔 그냥 색이 예뻤다.
푸른색이었는데
단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에서 빛이 번지는 색이었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아니, 사람 같은 형체.
경계가 흐려져 있었다.
발은 땅에 닿지 않았고,
몸은 바람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묶여 있지 않다는 게
저렇게 평온할 수도 있구나.
나는 한참을 서서 그 그림을 보다가
아주 오랜만에 웃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림 좋아하세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는데 눈은 이상한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밝았다.
“네… 이거, 누가 그린 거예요?”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요.”
그게 건혁 선배와의 첫 대화였다.
선배는 그림이야기를 할 때면 아이처럼 순수하게 변했다.
“그림에 있는 이 사람은요,
누가 뭐라 해도 자기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유로운 영혼이거든요.”
“묶여 있지 않아서요?”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유라는 것은 중요하잖아요."
선배는 자기 아버지 이야기도 했다.
“아버지는 항상 제 그림을 보면 살아있어서 좋다고 하셨죠. 아버지는
제가 그림 그리는 거 제일 좋아하세요. 저를 늘 믿어주시고 응원해 주시죠. 그 덕분에 저도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찔렀다.
누군가는 가족에게 사랑받을 수도 있구나.
나는 그날 이후 나는 가끔 미대 건물 작업실에 들어가 선배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그림을 몰래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색을 고르는 법을 배웠고,
선에 힘을 빼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조금씩,
숨 쉬는 법을 배웠다.
손은 떨렸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렇게 선배랑 나는 점점 친해졌고, 어느 순간 선배는 나에게 편히 말을 했다.
왜인지 선배만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비가 내린 어느 날,
교문 앞에서
아버지가 서 있었다.
정장 어깨 위로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잔잔하게 시작한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하린.”
으름을 부르는 한마디 만으로도 심장이 조여왔다.
“이게 네가 할 짓이냐.”
알고 보니 주변 친구들 아니 감시자들이 나의 최근 행적을 아버지께 일러바친 것이었다.
주변 시선이 모였다.
"내가 이러려고 너를 이 학교를 보낸 줄 알아?
한심하게 하라는 공부를 안 하고 그림을 그려?
무식한 년 같으니..."
나는 예전처럼 고개를 숙이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용기가 났다.
"아버지,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어요. 저도 저의 인생이 있어요. 그러니 제발..."

따끔한 소리.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비가 세게 쏟아졌다.
차가운 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눈물이었는지
빗물이었는지
모르는 채로.
"이런 염병할. 너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이 자식이."
아버지는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나는 예전처럼 가만히 바라봤다. 어린 시절 때처럼
"그만하세요."
그때 누군가
내 앞에 섰다.
건혁 선배 였다.
비에 젖은 채,
손을 내밀어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당신 부모 맞아? 부모란 자식의 길을 막는 존재가 아니라 응원해 주고 믿어주는 존재야. 그리고 행복을 바라는 존재라고, 그런데 뭐 딸의 인생을 막아? 네가 그러고도 부모고 사람이야?"
자식의 꿈을 부모라면 지켜줘야지. 막는 게 아니라..."
평노 차분했던 선배가 숨을 거칠게 몰아 쉬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건혁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그림을 좋아하는 한 명의 학생이죠."
그리고 나를 힐끗 보았다.
“근데 하린이의 인생은 당신 사업이 아니야."
비가 더 거세졌다.
나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 그림 그릴 거예요. 저도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어요.”
목소리가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한참 나를 보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 뒷모습이
처음으로 작아 보였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조금 붙어 있었고, 손등에는 아직도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까 전, 내 앞을 막아섰던 그 손.
그 손이 아직도 내 시야에서 떠나지 않았다.
선배는 내 손을 잡고, 학교 근처에 있는 와플 가게로 들어갔다.
와플 가게 안은 달콤한 냄새로 가득했다.
바삭하게 구워지는 소리, 설탕이 녹는 향, 사람들의 낮은 웃음소리.
방금 전까지 쏟아지던 폭우와는 전혀 다른 세계 같았다.
선배는 와플을 한 입 베어 물더니, 늘 그렇듯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이상하게 사람을 안심시켰다.
마치 “괜찮아”라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끼게 만드는 얼굴.
나도 따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목이 메었다.
“괜찮아?”
그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손수건을 내밀었다.
평소에도 늘 가지고 다니던, 보라색 손수건.
나는 웃었다.
괜찮은 척, 늘 하던 대로.
그런데 눈물이 났다.
빗물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어요?”
선배는 잠깐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누군가 멈춰 있으면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그 말은 이상하게 깊게 꽂혔다.
가게를 나왔을 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우산도 없이 천천히 걸었다.
걸으면서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선배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쉼을 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어떤 사람이 내 그림을 보고 잠깐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게.”
그는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듯 웃었다.
진심을 말할 때마다 조금 어색해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솔직했다.
나는 아직, 내가 뭘 원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말하고 나니 조금 부끄러웠다.
너무 거창한 말 같아서.
선배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게 하린이 너의 꿈이네.”
그 말을 듣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늘 내 꿈을 ‘정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선배는
내가 말한 걸 그대로 돌려주었다.
수정하지도, 고치지도 않고.
그의 눈을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가 빗물에 더 선명해 보였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이 감정이 뭔지, 나는 아직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던 순간부터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의 옆에 서 있으면
나는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이었다.
그게 좋았다.
비를 맞으며 걷다가,
그가 무심히 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깨가 스칠 듯 말 듯한 거리.
“하린아.”
그가 나를 불렀다.
이름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따뜻해졌다.
“다음엔… 비 오기 전에 와플 먹자.”
나는 웃었다.
이번에는 눈물이 섞이지 않은 웃음이었다.
“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는
‘당신이랑 이면 좋다’는 마음이
조금 섞여 있었다.
그는 모를지도 모른다.
아니,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비가 내리면
나는 두려움보다 먼저
그날의 등을 떠올린다.
내 앞에 서 있던 사람.
내 인생이 사업이 아니라고 말해주던 사람.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며
조용히 심장이 흔들렸던 날.
...
휴대폰 화면이 켜져 있다.
"하린아, 공모전 접수 아직 안 끝났지?"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본다.
선배가 다시 걷고 있다.
다시 예전에 선배처럼...
비 오는 날
내 앞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나의 운명을 바꿔준 사람이었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서 있을 차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책상 서랍을 연다.
서랍 안에는 보라색 손수건과 오래된 스케치북이 있었다.
스케치북 군데군데 찢긴 자국이 있었고,
먼지가 조금 쌓여 있다.
연필을 든다.
손이 아직 조금 떨린다.
그래도 이번에는
숨기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이번에는
나로 그리자.
그리고
그 사람이
처음 웃게 해 준 나로.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