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않는 가까운 빛

도시던전 2

by 따심토

미술공모전 마감까지 한 달도 안 남은 어느 날
건혁은 작업실 한쪽에 놓인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여러 화가들의 작품이 떠 있었는데
색채의 대비가 강렬한 표현주의 작품,
도시의 고독을 담은 현대 미술,
빛을 해부하듯 쪼개 놓은 인상주의 화풍까지.
어젯밤부터 건혁은 다양한 그림을 보며 잊힌 감각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했다.
수리는 그의 뒤에 서서 입술을 내밀며 화면을 빤히 들여다봤다.
“미술이라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오늘의 퀘스트는 뭐예요?”
은빛 머리카락이 아침 햇빛을 받아 은하수처럼 부드럽게 반짝였다.
건혁은 마우스를 멈추며 말했다.
“자료 조사. 그리고 준비물 사러 가야 해요.”
“약탈?”
“아니요.”
“그럼 도시 던전 탐험이네요.”
수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 많을 것 같아요.”
건혁은 웃었다.
“이 그림은 왜 보는 거예요?”
하린이 한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건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의자를 돌려 수리를 마주 봤다.
“이건요… ‘도시의 숨’을 그린 거예요.”
화면 속 그림은 빽빽한 빌딩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을 표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작게, 거의 점처럼 그려져 있었고
도시는 거대하게 솟아 있었다.
“보세요.”
건혁이 말했다.
“사람은 작게 그렸지만, 색이 사람 주변을 더 따뜻하게 비추고 있잖아요.”
수리는 눈을 크게 떴다.
“…아. 도시가 사람을 삼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이 도시를 밝히고 있네요.”
“맞아요. 그게 이 화가가 말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규칙 속에 살지만,
그 안에서도 빛을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니까요.”
“ 건혁씨는 그럼 어떤 빛을 그릴 거예요?”
건혁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 누군가가 멈춰 서 있을 때, 다시 걸을 수 있게 만드는 빛. 살아있는 빛을 그릴거에요.”
...
미술 재료 상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캔버스, 물감, 붓, 나이프.
각자 다른 무기를 고르는 모험가들 같았다.
“이건 뭐예요?”
“아크릴.”
“이건?”
“유화.”
“그럼 이건…”
“비싼 미술용품이에요.”
수리는 가격표를 보고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법보다 무섭네요.”
건혁은 웃다가, 문득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선배?”
하린이 서 있었다.
“하린아.”
“공모전 준비하시는 거죠?”
“…어.”
하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선배가 다시 그림 그린다고 했을 때…
저 진짜 기뻤어요.”
수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안녕하세요, 하린 씨. 오랜만이네요.”
“… 안녕하세요.”
"아직 있었네요?"
“아직 돌아갈 방법을 못 찾았어요.”
“… 그렇구나.”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아주 얇았다.
세 사람은 가게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건혁은 도시의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신호등.
횡단보도.
규칙적인 보행선.
연필 끝이 잠시 멈췄다.
“선배.”
하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그림… 어떤 거 그리실 거예요?”
“아직 정하지 못했어. 너는?”
하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지르며 시선을 떨궜다.
“… 저는요.
저한테 가장 소중한 추억을 그릴 거예요.”
건혁이 물었다.
“그게 뭔데?"
하린은 얼굴을 붉히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시선이 아주 잠깐,
건혁의 옆에 앉아 있는 수리에게로 향했다.
수리는 빨대를 입에 문 채
무언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하린의 심장이 묘하게 내려앉았다.
그 감정이 질투인지, 두려움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그냥, 예전이에요.”
결국 그렇게 얼버무렸다.
예전.
건혁이 아직 웃는 게 서툴지 않았던 때.
자신을 보며 망설임 없이 이름을 불러주던 때.
지금의 건혁은 분명 다시 붓을 들었다.
빛을 말하고, 살아있는 그림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빛의 방향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하린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수리가 말했다.
“도시는 던전 같아요.”
둘의 시선이 향했다.
“규칙이 많고, 길을 잘못 들면 다쳐요.
하지만… 끝까지 가면 보상이 있잖아요.”
건혁은 그 말에 크게 미소를 짓었지만 하린은 옅게 미소 지었다.
선배와 자신 사이에 서있는 정체불명의 여성
마치 자신이 낄 수 없는 거대한 공간이 생긴 기분을 하린은 느끼고 있었다.

그때 잠시 조명이 흔들리고, 설탕 봉지가 터져
하얀 가루가 테이블 위로 흩어졌다.
“…아.”
수리가 손을 바라봤다.
“요즘 마력이 말을 잘 안 들어요.”
그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건혁의 소매를 잡았다.
“선배, 방금… 못 느끼셨어요?”
건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뭘?”
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놓았다.
“… 아니에요.”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뛰고 있었다.
...
책과 향 냄새가 가득한 서림당.
회색노인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디어 다시 시작했군.”
그 앞에 앉은 꽃이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미소 지었다.
“그 아이도… 인간계에 있으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어요. 예전의 과거를 잊고, 점차 생기를 되찾고 있죠. 다만 균열은 오래 열어둘 수 없어요.”
노인이 차를 따르며 말했다.
“던전에 들어왔다는 건
시련도 함께 온다는 뜻이죠.”
여자는 낮게 웃었다.
“그럼 곧 시련이 시작되겠네요.”
노인은 조용히 침묵했다.

어느 깊고, 어두운 골목.
공기가 일그러졌다.
“스페이티움, 루멘 패스.”
빛이 찢어지듯 갈라졌다.
그 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코트에 차가운 눈.
“인간계는 오랜만이군.”
그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자… 우리의 귀여운 도망자를 찾으러 가볼까.”
균열이 천천히 닫혔다.
그리고 골목 벽에 희미한 균열 자국이 남았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이미 이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증거처럼...
카페 안은 다시 잔잔했다.
컵을 내려놓는 소리, 낮게 깔린 음악,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노을빛.
수리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그때 아주 미세하게,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리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갑자기 이상해진 수리를 건혁과 하린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