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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17. 2023

신과 악마의 동물

악은 성급하여 자신의 욕구를 지연시키지 않는다.

모든 동물 중에 인간도 포함될까? 침팬지와 인간은 96% 유사하고 개인 인간은 서로 0.1%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각각의 종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고 인류는 직선 계보가 아니라 나뭇가지 계보로 진화했다고 한다. 인간의 뇌 사용량은 10% 안팎이고, 뇌는 몸의 3% 뿐인데도 에너지는 전체 에너지의 20%를 소비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해되지 않고 알 수 없는 것들을 상상력으로 빈 공간을 채워 넣었다. 

인간의 정신은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속한다. 나머지 90%는 무엇에 쓰일까? 왜 있을까?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한 것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 신이 아닐까? ‘신이 있을까’와 ‘신을 믿는가’는 다르다. 난 신이 있는 것이 살아가는데 훨씬 이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가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결정하면 된다.

숫자는 많은 상징을 담고 있다. 1은 유일한 하나, ‘나’이고 ‘신’이고 전부이다. 1은 독보적인 존재이다. 2는 당연히 ‘너’이며, 두 가지가 서로 대립하며 공존한다. 다정하지만 이중적이고 양면성을 지닌 숫자이다. 3은 우리를 뜻한다. 나, 너, 우리. 여기서는 ‘2’가 나온다. 선과 악, 본능과 자아, 갈등과 선택, 책임과 의무, 악은 선하게 생겼지만 여전히 악이고, 악처럼 생긴 것은 우리를 보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신과 악마, 늑대와 염소. 통제와 자율. 떡갈나무와 포도나무.

신이 모든 동물을 만드시고 늑대는 신의 애완동물로 삼으시고 염소는 잊으셨다. 악마도 창조하고 싶었는데 마침 신이 빼놓고 잊으신 염소를 자기가 만들었다. 길고 부드러운 꼬리를 가진 염소로 멋지게 만들었지만 이 염소의 꼬리는 항상 악마를 귀찮게 했다. 길고 부드러운 꼬리가 자꾸 가시나무 덤불에 걸리니 그럴 때마다 악마가 가서 그 꼬리를 풀어주어야 했다. 귀찮은 악마는 짜증 나서 염소의 꼬리를 전부 잘랐다. 이제 악마는 염소들을 혼자 풀을 뜯도록 내버려 주었으나 열매 맺는 나무와 신이 가장 사랑하는 포도나무를 갉아먹고 아끼는 식물들도 뜯어먹었다. 

신께서는 화가 나서 늑대를 풀어놓아 과일나무 근처에 오는 염소들을 찢어 놓았다. 이것을 알게 된 악마는 신에게 가서 당신의 동물이 내 염소를 찢었으니 배상을 하라고 했다. 신은 떡갈나무 잎이 떨어지면 그때 주겠다고 하였다. 떡갈나무 잎이 떨어지자 악마는 신에게 찾아갔지만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있는 떡갈나무 잎사귀는 아직도 있다고 하였다. 화가 난 악마는 떡갈나무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잎이 떨어진 떡갈나무를 찾아 6개월 동안 온 세상을 다녔지만 떡갈나무는 새로운 새잎이 돋아났다. 화가 난 악마는 염소의 눈을 뽑아 버리고 자기 눈을 대신 박았다. 그래서 염소는 악마의 눈과 뭉툭한 꼬리를 가지게 되었고, 악마는 염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이다. 

    

선하고 악하며,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고, 의존적이지만 자립심을 가졌다. 인색하고 고집스럽지만 강인하고, 자유롭지만 통제하기 힘들고, 영리하여 쉽게 나쁜 짓을 하며, 무기가 될 게 없지만 인내할 줄 아는 것. 느껴지는가? 신께서 인간을 만드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염소를 빼놓은 이유는 알 것 같다. 

처음에 악마가 신을 모방하여 만든 염소는 길고 부드러운 꼬리를 가졌다. 모든 동물의 꼬리 중에 제일 멋진 것을 달아주었지만 그것은 참으로 불편한 것이다. 길고 부드러운 털이 장애물을 만나면 항상 누군가 도와주러 와야 하는데 그건 악마의 성질에 귀찮은 일이었다. 꼬리는 동물들에게 원하는 방향을 가려고 할 때 균형을 잡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꼬리에서 꾀가 나온다. 그 중심은 장애물에 항상 걸린다(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지는). 악마는 본문에 나온 것처럼 본성이 파괴적이라 중심을 잘라버렸다. 

꼬리 잘린 염소는 이제 아무런 장애도 없이 들판을 다녔다. 문제는 염소가 엄청난 먹보라 보이는 식물은 모두 먹는 데 있다. 신께서 아끼는 열매 맺는 과일나무들을 먹었을 때 신은 늑대를 풀어놓았다.

여기서 늑대는 왜 신의 곁에 두셨을까? 늑대는 파괴적이고 이기적이고 난폭하고 엄청난 공격성을 가지고 있으니, 신이 곁에 두고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널 보고 있다. 잘해라. 민담에서 늑대는 하느님의 개라고 말하는데 염소의 악행에 대한 형벌이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신의 명령이 내려졌을 때만 행동한다. 길들인 늑대는 개이고 개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충실히 이행하기에 개는 충성스럽다는 말을 듣는다. 자기 욕구에 빠질 자유가 있음에도 주인의 요구를 따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늑대는 악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역할이다. 우리나라 사찰 안에 들어갈 때 만나는 사천왕상처럼 말이다. 어렸을 때 그곳을 지나가는 게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자아를 상징하는 나무는 우리 인격의 체계를 세우는 중요한 부분이다. 염소는 악마가 관리한 것처럼 자아가 자라기 시작하면 그것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뜯어먹는다. 신의 명령에 따라 늑대가 염소를 찢어놓자 악은 신에게 불평하고 신에게 떡갈나무 잎사귀가 떨어지면 배상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항상 불평하고 합리화시키는 것. 자기가 한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손해 본 것만 생각하는 악마. 혹시 우리가 그런 것은 아닐까? 문제는 바로 나였다. 

염소가 식물을 먹는 것은 본성이지만 그것을 참아내야 늑대에게 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먹고 싶다. 경험을 통해서 발전해야 하지만 본성은 자신의 욕구를 지연시키지 못한다. 선천적인 형태일 뿐이다. 싹을 보면 안다고 했던가? 인간을 식물에 비유하였다. 여기서는 자아를 표현한다. 악은 여기 있으나 신은 가까이 있다는 말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개인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라는 싹이 나면 본성이 나타나 그것을 없애버리니 신께서 화가 나실 만도 하다. 여기서의 염소는 유해한 인간의 본성을 나타낸다. 또 그 본성이 잘못했을 때는 신의 늑대가 와서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의 떡갈나무 하나로 이해하는 한, 악마는 신을 이기지 못한다. 세상의 떡갈나무는 언제나 어디서든 잎사귀를 떨어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시간을 주관하신다. 신이 만든 세상 속은 굳건하고 불변하여 악마가 아무리 우리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여도 결코 신은 우리를 그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한다. 악마는 떡갈나무 잎사귀가 떨어진 것을 찾으려고 온 세상을 다녔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악은 결코 선을 이기지 못한다. 

화가 난 악마는 염소의 눈알을 뽑아내고 자신의 눈을 넣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고집세고 어리석은 염소가 악마의 눈까지 가지게 되었으니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을 더 어렵게 되었다. 

머리는 온 우주를 담고 있지만 정보를 인식하여 판단하고 행동할 때 어떤 게 옳은 것인지 언제나 혼란스럽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의 관점은 넓고 악마의 시야는 좁다는 것이다. 늑대나 염소처럼 인간도 악이지만 선이기도 하다. 선의와 악의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눈이 아니다. 지혜는 신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은총은 잘못을 했을 때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미리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했을 때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신은 언제나 받아주신다. 

모든 민담에서는 갓난아기도 출생 시부터 한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만큼 가장 긴 유년 시기를 보내는 동물이 없다. 성장하면서 인간은 욕망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가지를 계속해서 갈등한다. 개인이 성숙하여지길 바라는 신의 자비로움이 바로 가장 아끼는 과일나무라고 하는 말로 표현했다. 

두 개의 나무 중 하나인 떡갈나무는 참나무이다. 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우리나라 말은 참 재미있다. 나무 중에 진짜이고, 기름 중에 진짜 깨로 짠 것이 진짜, 나리꽃 중에 진짜, 사물이 가진 정체성을 완벽히 표현하는 것들에 ‘참’이 들어있다. 떡갈나무는 성스러운 나무로 신화에서는 그 나무가 물의 순환을 조절하는 존재라고 한다. 떡갈나무는 신탁을 받는 장소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의 떡갈나무 잎이 아직 안 떨어졌다는 신의 말은 신이 그 나무와 ‘함께’하신다는 말이다. 민담 속에 나오는 떡갈나무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포도나무는 또 어떠한가? 가장 아끼는 포도나무는 죽었다 부활한 디오니소스를 생각하게 하면서 예수를 생각나게 한다. 성찬 때 마셨던 술이 와인이 아닌가? 모든 나무가 다 나름의 신화를 가지고 있지만 이 민담에서 콕 집어서 가장 아끼는 포도나무 싹을 먹자 신이 화를 내어 늑대를 보냈다고 했다. 포도나무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어 다른 나무들에 의지하여야 성장한다. 마찬가지로 삶의 모양과 내용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주의를 사용하는가에 의존한다. 마시면 광기와 함께 인지 능력을 알려주는 마법의 나무가 포도나무이다. 포도주가 주는 뜨거움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본능이 왔을 때 자신의 욕구를 동화하느냐 안 하느냐는 것은 언제나 자아의 영역이다. 

나뭇잎의 살랑거림과 숲 속에서 나는 모든 소리는 신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알게 해 준다. 겨울이 되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나무들이지만 신은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말을 전하고 계신다. 듣고자 하는 자에게만 들린다. 내가 나에게 하는 소리가 설마 부정적이겠는가?  自信이라고 하지 않는가? 신은 어디서나 있고 언제나 보고 계신다는 말이 무섭지만 얼마나 든든한가. 악마의 속삭임은 '아무도 몰라'이지만 천만에, 내가 안다. 그래서 힘들다. 우리의 욕구해결 방법에 따라 우리는 악이기도 선이기도 하다. 

신이 가장 사랑하는 우리가 성숙해져 열매를 맺길 바란다. 용서는 신의 단어이다. 인간은 용서를 빌고 신은 자비를 베푸실 뿐이다. 신에게는 정신도, 징벌도 함께 주고 염소는 정신도 징벌도 받는다. 

여담으로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 3가지가 있는데 데메테르의 곡물, 디오니소스의 와인, 아테네의 올리브오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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