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만, 때로는 삶을 뒤흔드는 병
1940년 5월 유럽을 포함해 세계는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나치는 폴란드를 점령했고 프랑스는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영국군은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되어 있었고 영국은 사실상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런던의 전시 내각 회의실.
회의실 안에서 몇몇 장관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총리님… 독일과 협상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현실적인 제안이었습니다.
히틀러의 군대는 유럽을 휩쓸고 있었고 영국은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총리 윈스턴 처칠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연설은 이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가 되었고
영국이 끝까지 저항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영국이 협상을 선택했다면
2차 세계대전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강인한 지도자는 평생 우울증과 싸웠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처칠은 자신의 우울증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black dog — 검은 개.”
그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떤 날에는 아무 이유 없이 검은 개가 나를 따라다닌다네.”
또 한 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햇빛이 비추고 있는데도 내 마음속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네.....”
놀랍게도 그는 그런 시기를 지나 다시 일어났고
결국 세계사를 바꾸는 결정을 내리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줍니다.
우울증은 의지가 약한 사람에게 오는 병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병이라는 사실입니다.
우울증은 종종 감기와 비교됩니다.
감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대부분은 며칠 지나면 자연스럽게 낫습니다.
우울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친구와 가볍게 다툰 뒤 며칠 동안 기분이 가라앉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직장에서 상사에게 혼이 난 뒤 하루 종일 기운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한동안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반응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회복됩니다.
다시 친구를 만나 웃기도 하고
새로운 일에 몰두하기도 하고
어느 날 문득 예전처럼 평범한 하루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경우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우울이 그렇게 지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우울은 감기처럼 지나가지만
어떤 우울은 폐렴처럼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 문제는 단순히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우울이 끝나지 않을 때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울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 됩니다.
정신과에서 말하는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 상태가 아닙니다.
대표적인 우울관련 진단은 주요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 입니다.
DSM 진단 기준에 따르면 다음 증상 중 5가지 이상이
2주 이상 지속되어야 합니다.
우울한 기분
흥미 감소
식욕 변화
수면 변화
피로감
집중력 저하
죄책감
정신운동 변화
죽음에 대한 생각
이 기준을 만족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입니다.
실제로 임상에서 이 기준을 완전히 만족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해서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위 기준을 부분적으로만 충족하는 우울 질환은 Depressive Disorder NOS로 분류됩니다.
즉 우울은 분명 존재하지만
“주요우울증”이라는 높은 진단 기준에는 약간 모자라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 역시
삶의 질 저하
기능 저하
향후 주요우울증 발생 위험 증가
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은 매우 복잡합니다.
오랫동안 가장 널리 알려진 설명은 모노아민 가설(monoamine hypothesis) 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울증에서는 뇌의 특정 신경전달물질이 감소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입니다.
우울증 치료에 가장 널리 쓰이는 SSRI 같은 항우울제는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억제하여 세로토닌 신경의 기능을 높입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우울증이 단순히 신경전달물질의 부족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울증 환자의 뇌영상 연구에서는
Default Mode Network(DMN) 라는 뇌 네트워크의 변화가 관찰됩니다.
DMN은 조금 낯선 이름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뇌의 네트워크'입니다.
사람이 외부 일에 집중하고 있지 않을 때,
예를 들어
지하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샤워를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밤에 침대에 누워 하루를 떠올릴 때
이때 활성화되는 뇌 네트워크가 바로 DMN입니다.
이 네트워크는 주로
내측 전전두엽
후대상피질
해마
같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의 주요 기능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생각들입니다.
“오늘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내가 조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들은 사실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 과정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멈추지 않을 때 생깁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자주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반추(rumination) 입니다.
반추라는 말은 원래 소가 되새김질을 하는 것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같은 생각을 계속 반복해서 되씹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상사에게 혼이 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재수가 없었네.”
“다음에는 좀 더 잘해야겠다.”
정도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우울증이 있는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왜 나는 항상 이런 실수를 할까.”
“나는 정말 능력이 없는 사람인가.”
“아마 회사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거야.”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리고 이 생각은 밤에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같은 생각을 반복합니다.
마치 머릿속에서 같은 영화 장면이 계속 재생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뇌 영상 연구를 보면 이런 상태에서 DMN의 활동이 과도하게 증가해 있습니다.
특히 내측 전전두엽과 후대상피질의 활동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쉽게 말해 뇌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 모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어떤 일에 집중할 때는
Task Positive Network
라는 다른 네트워크가 활성화됩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문제를 풀 때입니다.
건강한 뇌에서는 이 두 네트워크가 균형을 이루며 번갈아 작동합니다.
하지만 우울증에서는
DMN이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외부 활동에 집중하는 네트워크가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멈추지 않아요.”
흥미로운 점은 항우울제 치료나 정신치료가 진행되면서 DMN 활동이 정상화되는 것이 관찰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명상 연구에서도 DMN 활동이 조절되는 것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런 연구들은 우울증이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니라
뇌 네트워크의 조절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울증은
신경전달물질
뇌 네트워크
유전적 요인
인생의 사건들(life events)
이 복잡하게 얽혀 나타나는 질환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마음을 강하게 먹어라”는 말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울증을 의학적인 질환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하루는 생각보다 길고 무겁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이미 피곤합니다.
몸이 아픈 것은 아닌데
마치 온몸에 납이 붙어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알람이 울립니다.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침대에서 한참을 누워 있다가 겨우 일어나지만
샤워를 하는 것조차 큰 일처럼 느껴집니다.
출근을 해도 집중이 잘 되지 않습니다.
메일을 읽다가도, 책이나 문서를 읽다가도
같은 문장을 몇 번씩 다시 읽습니다.
사람들이 웃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마치 유리벽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이번에는 머릿속이 바빠집니다.
“오늘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이 생각은 밤이 깊어질수록 더 또렷해집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듭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같은 하루가 시작됩니다.
정신과 진료를 하다 보면 여러 항우울제를 사용했는데도
전혀 좋아지지 않는 환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를 치료저항성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환자들 중 일부는 사실
양극성 장애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유명한 역사 속 인물들의 예가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어떤 시기에는 하루에 몇 점씩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고
또 어떤 시기에는 깊은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엄청난 창작 에너지와 깊은 우울을 반복했습니다.
오늘날 일부 정신의학자들은
이들의 삶이 양극성 스펙트럼을 시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양극성 장애에서는 처음에는
우울증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상에서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환자는 정말 우울증일까
아니면 조울증의 한 형태일까?”
결국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유전자
신경전달물질
뇌 네트워크
인생의사건들
이 복잡하게 얽혀 나타나는 질환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울증은 치료 가능한 병이라는 것입니다.
처칠이 말했던 '검은 개'는
어떤 날에는 우리 모두의 문 앞에 앉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 전체를 차지하도록 둘 필요는 없습니다.
우울증은 인간의 약함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질환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질환이 그렇듯, 치료하면 좋아질 수 있는 병이기도 합니다.
-우울증에 대하여-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