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신호등 건너편에 서 있었다. 우산을 쓰고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짙은 회색의 세상은 오전 내내 비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면 사람들은 이슬 같은 작은 방울에도 우산을 펼친 채 바쁘게 걷고 있었다.신호등 건너편의 검은 선글라스 남자는 긴 우산을 한 손에 들고 모델처럼 당당히 내 옆을 지나갔다.
이슬비쯤이야, 멋지게 맞아 주겠다는 걸까. 햇빛 한 땀 없는 우중충한 날에 그는 왜 그런 차림을 하고 있을까. 수사관이 된 듯 잡다한 생각을 굴리며 집을 향해 걸어갔다.
공중에 떠 있던 탁한 공기와 소리를 누군가 바닥으로 끌어내려 놓은 것처럼, 세상은 얌전했다. 누가 소음을 잡아먹은 걸까. 촉촉이 젖은 바닥 사이로 온갖 쓸모없는 오물들이 틈틈이 박혀 있었다.
나의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게 한 것은 분명 신호등 남자였다. 그를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이런 디테일까지 들여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세상의 소리에 민감해지고, 마법 같은 시간 속에서 반응하고 있었다.
일상을 느끼는 발걸음 속에는 흔히 가질 수 없는 순수함이 들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냄새조차 없는 산소를 마시며 ‘느낌’을 잠시 붙잡아 본다. 세상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 초시계 소리만 착착착 돌아간다.
세상이 다시 소리를 찾기 전, 나는 조용히 펜을 들어 나를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