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아들의 공기는 무겁다.
물건을 쌓아두고 정리를 미루는 남편은 ‘언젠가는 쓰이겠지’라는 명목 아래 멈춰 있다. 바닥에 늘어놓아야 잘 찾는다는 논리로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영역을 단단히 붙잡고, 그것을 만지거나 정리하려는 사람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쓰레기를 움켜쥔 것처럼 보여도, 종이 쪽지 하나까지 소중히 여기는 일은 그의 자존심과 닿아 있다.
정리해서 걷어내자는 아들의 말도 맞고, 천천히 하겠다는 남편의 말도 맞다. 생각의 결이 달라 삐걱대는 날이 깊어질수록, 마음에 담은 하나씩이 높아진다. 같은 공간의 공기는 기분 나쁘게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 분위기를 벗어나 보려고 운전대를 잡았다. 목적지도 없이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우리의 비상구, 인천 연안부두였다.
짭짤한 바다 향기가 번지는 그곳은 처진 어깨를 잠시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부둣가에 정박한 배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일렬로 선 모습이 군인처럼 단정했다. 목적지를 알고 싶어 매표소 근처를 서성였다.
그때였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영정사진과 보자기에 싼 유골함을 들고 줄지어 나왔다. 그곳에 서 있던 배들은 장례를 위해 출항하는 배였다. ‘사람과 동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낸다’는 문구가 벽면에 크게 붙어 있었다.
내 마음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걷는 그들의 뒷모습에는 엄숙함이 배어 있었다. 붙들 수 없는 순간을 놓쳐버린 사람들.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건너는 유가족의 행진이 묘하게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팽팽히 맞서 있던 우리 집의 일그러진 일상이 작게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행복의 한가운데에서 부리는 투정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남편과 아들 사이에 끼어 비상구를 찾아 여기까지 왔지만, 뜻밖의 장면 앞에서 밀려든 것은 해방감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었다.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 서로를 향해 여전히 말을 건넬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제야 또렷해졌다.
비상구는 멀리 있지 않았다.
같은 공간의 무거운 공기를 견디며,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 어쩌면 그것이 내가 찾아야 할 진짜 비상구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짭짤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비상구는 어쩌면 밖이 아니라,
다시 들어가야 할 문 쪽에 나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