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잔의 여유, 아메리카노를 이해하기까지

by 자그노기

딸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향한다.

그곳은 딸에게 집중의 공간이자, 세포를 깨우는 성전 같은 곳이다.

투명한 유리컵 속 얼음 사이로 진한 아메리카노가 내려앉고, 그 첫 모금이 목을 타고 흐르는 순간, 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쓴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된다.

냄새는 좋은데, 도무지 입이 당기지 않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지만, 나는 여전히 그 세계에 발을 들이기 망설인다.


예전엔 다방이라는 곳이 있었다.

유리잔에 든 쌍화차, 레몬차, 때로는 인삼차까지.

우리의 커피는 늘 ‘믹스’였고, 종이컵에 반쯤 채워 마시던 달큰한 향이 위로였다.

그 반잔의 커피 속엔 설탕처럼 녹아 있던 대화와 여유가 있었다.

속도보다 온도를 중시하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다르다.

가족이 모이면 예쁘고 독특한 카페를 검색해 찾아간다.나는 마지못해 따라가지만, 딸은 “이곳은 커피가 비싸도 분위기가 좋아”라며 웃는다.

투명한 잔에 가득한 얼음과 그 위를 흘러내리는 검은빛 커피.

코끝을 자극하는 그 향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나는 여전히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딸이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세포가 깨어나는 그 순간의 표정을 보면, 문득 생각이 바뀐다.

‘커피의 맛이 아니라, 그 시간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게는 여전히 반잔의 여유가 있다.

가득 채운 잔보다, 반잔 남겨두고 천천히 마시는 마음이 좋다.

딸은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아메리카노로 집중을 얻고,

나는 느리게 식어가는 커피 향 속에서 여유를 배운다


언젠가 나도,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한 잔의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그 여운과 향기를 즐길 날이 올까.


그때쯤이면

딸의 커피잔과 나의 반잔 사이에 흐르던 거리도

조금은 가까워져 있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빗소리를 삼킨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