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어학연수(1996)
'죽느냐, 사느냐', '남느냐, 떠나느냐' 신입사원에게 해외연수의 기회는 현실적으로 드물다. 하지만 나는 꿈을 위해 상사에게 해외연수을 요청하였다. 연수가 안되면 그냥 휴직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상사의 대답은 'No' 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상사 입장에서는 새파란 신입사원의 당돌한 제안에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도전이라는 명분으로 직장생활 3년만에 회사에 사표를 냈다. 1996년 봄 아메리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가 선택한 지역은 캘리포니아주의 '프레스노(Fresno)' 라는 다소 생소한 도시였다. 보통 미국을 떠올리면 엘에이(LA) 나 뉴욕(New York)을 떠올리는데, 프레스노는 분명히 낯선 도시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경기 권의 '안성' 정도라고나 할까, 미국 서부 여행 패키지에 항상 포함되는 '요세미티 파크' 근처 도시이다. 프레스노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 나의 사촌 여동생이 그 곳 주립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도움으로 자연스럽게 대학 부설 어학원을 통해 학생비자를 취득했다.
미국 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지만 신선한 충격이자 삶의 활력이었다. 미국식 스타일의 조그만 단독주택을 월세로 얻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로망의 실현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곳에서의 삶이라는 현실의 어려움에 부딪쳤다. 주말마다 문 앞 과 뒤뜰에서 자라는 잔디들의 엄청난 생명력을 저지하기 위해 고전분투 해야 했다. 수시로 방문하는 UPS 직원들, 외판원들, 동네 사람들이 낯선 삶을 경험하게 했다. 원활하지 않은 영어 소통 때문에 자주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소한 일상생활이 외국 사람들 과의 만남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게 해주었다.
학교 통학은 자전거로 가능했지만 자동차가 필요했다. 미국은 땅이 넓어서 그런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너무 불편한 것들이 많았다. 아내와 아이를 위해서도 그러했다. 결국 미국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동네 신문을 통해서 10여년쯤 된 저렴한 중고 포드 '에스코트'를 장만했다. 역시 미국은 자동차가 없으면 안되는 나라가 맞다. 간단한 식재료를 구입을 위해 마트를 가거나 주말에 동네 공원을 놀려 가려 해도 자동차가 필요했다. 그 만큼 땅도 넓고 상점들이 집에서 먼 거리에 있었다. 미국이 자동차 왕국이 된 이유다.
대학 어학원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첫 수업을 출석했다. 학교수업은 도전의 목표이자 결과였다. 전세계에서 모인 친구들은 모두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 보니 서로 빨리 친해졌다. 특히 교실에서의 수업 뿐만 아니라 매주 지역 명소 탐방, 관공서 방문, 공원 피크닉을 통해서 미국의 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할로윈 파티, 추수감사절 행사, 크리스마스 파티 등를 통해서 미국의 생활을 체험했다. 더군다나 수업에 참여한 글로벌 친구들과는 수시로 포트락(Potluck) 파티를 했다. 각자의 나라 음식들 싸 들고 모여 여러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나누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클라스메이트는 '노브'라는 일본 친구다. 스스로를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족 이라고 소개했다. 일본 신문사에서 1년동안 연수하고 있었던 부부다. 이들은 우리 부부와 특히 친하게 지냈다. 마음이 따뜻한 요리사 출신인 '마나브'는 가끔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맛난 일식 요리를 대접해 주었다. 또, 어린 시절 학교 갈 때 스키 타고 다녔다며 스키장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던 금발의 알프스 소녀 하이디 같은 '플로렌스'. 항상 수업 후에 학교 도서관 같은 자리에서 열심히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매기' 등, 요즘도 가끔 미국 생활이 그리워 질 때면 그 친구들이 생각 난다.
나의 목표는 미국에서 영어 어학연수를 하며 자동차 관련 회사에 취업하는 것과 대학원 진학 이었다. 그러나 취업과 대학원 진학은 성취하지 못했다. 어학연수원에서의 수업과 대학에서의 한학기 청강은 무사히 마쳤다. 1년이 다 되어 갈 무렵 가지고 갔던 전 직장의 퇴직금 잔고는 거의 바닥이 났다. 값진 경험과 소중한 추억 그리고 조금은 향상된 영어 실력을 갖고 귀국하게 되었다. 미국생활 1년은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날들 이었다. 그 당시의 소중한 경험이 현재 나를 있게 했다. 외국인 회사의 직원으로 일 할 수 있게 해 준 기반은 도전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