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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채 May 05. 2022

회현동 외삼촌들

외삼촌

자라면서 사람들에게 내가 자라던 동네는 '회현동'이라고 말하기를 꺼려 했다. 지방 사람에게는 생소한 지명이고 서울 사람들에게는 좋은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옆 동네가 서울역 인근이고 그곳 주변은 유명한 쪽방촌과 사창가가 있던 '양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남대문로 5가로 지명도 바뀌고 지역개발계획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덕분에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의 위상이 조금이나마 개선되어 다행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사람들이 물어보면 '회현동'보다는 '명동' 근처라고 한다.


첫째 외삼촌은 목사님이시다. 외할아버지는 만주에서 교편생활을 하시다 한국으로 넘어오셨다. 나의 모친이 태어난 곳이 만주였으니 아마도 1950년쯤인 듯하다. 회현동에 터전을 잡고 쌀가게를 운영하면서 3자매와 4남매를 키우셨다. 나의 어린 시절, 할머니는 아침마다 출근하는 큰아들에게 생달걀의 양쪽끝에 구멍을 내어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돌연 종교계로 입문하였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거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외숙모를 믿고 그러셨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외숙모는 나의 초등학교 은사님이다. 모친의 중매로 인연이 맺어졌다.


둘째 외삼촌은 엔지니어이시다. 나의 모친은 여러 가지 부업을 했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부업은 전자오락실이다. 1970년대에 전자오락실은 핫 아이템이었다. 온갖 전자 부품으로 이루어진 기계들은 좁은 공간에서 열을 뿜뿜 내면서 아이들 동전을 빨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고장도 자주 발생했다. 그때마다 모친은 둘째 외삼촌에게 도움을 청했고 퇴근 후에 자주 가게에 들러 전자오락기를 수리해 주셨다. 누나의 부탁에 싫을 만도 했을 텐데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심성이 너무 착하신 거 같다. 거의 칠순의 나이에 아직도 현업에서 기술자로 일을 하신다. 대단하시다.


셋째 외삼촌은 예술인이시다. 기타 가방을 둘러멘 모습이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한때 겉멋에 빠져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 삼촌에게 특강을 받기도 했지만 나아지질 않아서 바로 포기했다. 젊은 시절 가수 지망생은 현실과 타협하고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삼촌이 일하시던 강남의 럭셔리 호텔에서 아들의 백일 행사를 치른 기억이 있다. 음악을 통해서 기쁨을 주는 밴드마스터로서 음악을 계속하셨다. 며칠 전에 모친이 삼촌의 음악봉사 동영상을 보여주셨다. 신자들과 함께 찬송가를 리딩 하시는 모습을 보니 옛날 장발 단속을 피해 다니던 젊은 보헤미안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미소를 짓게 했다.


막내 외삼촌은 다재다능하시다. 제일 젊어서 그건가. 외모가 핸섬하다. 혹시 막장 드라마에서 나오는 출생의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보험사 교육부서에서 근무하셨다. 당시 여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엄청났었다고 들었다. 말도 잘하시고 유머 코드도 장난이 아니다. 나는 특히 삼촌의 글씨체를 좋아했다. 일명 '봉우체'라고 명명하고 따라 쓰기를 했다. 체육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를 닳으셨는지 테니스는 거의 선수급이다. 등산도 거의 구조 대원 수준이다. 벌써 환갑이 지났는데 아직도 청춘이시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단촐했다 하지만 외갓집에 가면 항상 복잡 복잡했다. 나는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어린 시절 외갓집과 같은 동네에서 살다 보니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친가 쪽에는 조금 미안하지만 외가 쪽과 지낸 시간상으로는 훨씬  많다. 부친도 외가댁 일에 항상 우선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친이 돌아가신지 49일째이다. 모친 옆에 외삼촌들이 있어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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