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
신문에 '남산 기관차'라는 별명을 가진 강 할아버지가 있었다. 나의 외할아버지 이시다. '강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단거리, 스케이팅, 승마, 기계체조 등에 두루 남다른 재주를 보인 만능 스포츠맨이다.<일간스포츠. 1985.10.21> '라고 소개되었다. 어린 시절 남산 아래 동네인 외가댁 근처에 살아서 할아버지와 많은 추억이 있다. 특히 나는 외가집의 첫 손주로서 이쁨을 독차지 했다. 가끔 어린 손주의 손을 잡고 남산으로 산책을 가셨다. 한번은 팔각정 올라가는 초입의 체육시설에서 어린 손주에게 철봉과 링 시범을 보여주셨다. 슈퍼맨처럼 하늘을 가르시던 할아버지의 멋진 모습이 아직도 사진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전부터 스케이트를 배웠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거 같다. 할아버지는 가끔 꼬맹이였던 나를 데리고 스케이트장에 가셨다. 스케이트장은 남산 야외음악당 옆 야외 놀이터의 공터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탔지만 나는 결코 할아버지를 잃어버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항상 얼음 위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 할아버지가 계셨다. 그곳의 중심에서 피겨 스케이트를 신고 옆으로 가고, 뒤로 가고, 점프를 하고, 회전을 하셨기 때문이다. 겨우겨우 서서 전진만 할 수 있었던 꼬맹이에게 얼음 위에서 자유자재로 이동하면서 갈라쇼를 연출하시는 할아버지는 너무나도 우아한 체육인이자 예술인이었다.
중국음식점은 어린 시절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짜장면이 귀한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는 남산 스케이트장에서 내려와 나를 데리고 북창동에 있는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에 가셨다. 식사와 요리를 중국 말로 주문하시고 식당 주인과 자연스럽게 중국 말로 얘기를 하신다. 신기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할아버지는 중국 만주에서 태어나서 성장했으며 젊은 시절 고등학교 체육 선생으로 근무하셨다고 한다. 혼란스러웠던 시기여서 국내로 이주해서는 교직과는 상관없는 미곡상(쌀가게)를 운영하시면서 회현동에 삶의 터전을 잡으셨다. 그곳에서 7남매를 키우셨고 나도 그곳에서 외삼촌들과 이모님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할아버지가 내게 지어주신 별명은 '십원만~’이었다. 쌀가게는 할아버지의 삶의 터전인 동시에 나의 놀이터였다. 한쪽 사무실 구석에는 사다리가 있어서 이층으로 올라갈 수가 있었고 이층에는 커다란 다락방이 있었다. 나는 그곳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잠시 외출할 때면 어린 내가 가게를 대신 보기도 했고 그 대가로 용돈을 주시기도 했다. 얼마줄까 하고 물어보면 나는 항상 눈깔사탕 사먹으려고 ‘십원만~’ 하고 대답했고 가게 돈통(금고)에서 정확하게 십 원짜리 동전 한개를 꺼내갔다. 맘만 먹었으면 그 이상도 가져갈 수 있었지만 어린 나에게 정직이란 것을 배우게 해준 경험이었다. 다행히 10살짜리 어린 시절의 도덕적 가치가 50살이 지나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가끔 옛 시절의 그리움이 느껴질때면 어린시절 놀이터였던 쌀집과 내가 살던 오래된 아파트가 생각난다. 이번 연휴에는 시간 내서 옛 추억의 길을 다시 걸어봐야겠다. 혹시 누가 알겠나. 남산 기관차의 칙칙폭폭 소리를 들을 수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