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치지 않은 선물
빵옥이는 아홉 살, 나와 동갑입니다. 할머니와 둘이 사는 아이입니다.
우리 집과 이웃한 집 문간방에서 파지를 주우며 혼자 살던 여수 할머니가 어느 날 손녀라며 데려온 지 몇 달이 되었습니다. 빵옥이의 진짜 이름은 만옥이입니다.
만옥이는 모든 게 동그랗습니다. 작은 얼굴도, 그 안의 큰 눈도, 코끝도 모두 동글해서 우리는 만옥이를 빵옥이라 불렀습니다. 어쩌면 여수 할머니 손을 잡고 우리가 놀던 동네 공터로 나왔던 날, 손에 들고 있던 단팥빵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날 이후 만옥이는 빵옥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집 옆집이고 나이도 같아, 여수 할머니는 반색하며 여러 번 말했습니다.
“같이 잘 놀아라.”
그러나 우리는 쉽게 친해지지 못했습니다.
빵옥이는 우리가 하던 놀이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아이처럼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공기놀이든 고무줄놀이든, 빵옥이와 한편이 되면 그 팀은 늘 졌습니다. 편을 가를 때마다 빵옥이 이름은 늘 마지막에 불렸고, 그러다 점점 깍두기가 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친구들은 가끔 빵옥이를 데리고 오는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가을 해 그름이 내린 날, 우리 가족은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제법 매서워 양순이도 자기 집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철커덩’ 거리며 우리 집 철문을 때리는 바람 소리 사이로, 자칫 놓칠 뻔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뜨끈한 콩나물국에 코를 박고 있던 내 귀에 스쳤습니다.
“은이야, 은이야.”
“누가 왔나?”
바람 들어올까 꼭 닫아둔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어 보니, 칠이 벗겨진 철문 아래로 익숙한 신발이 비쭉 보였습니다. 문을 열자 빵옥이가 속옷만 입은 채 서 있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정수리 아래 동그란 뒤통수로 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보다 더 놀란 엄마가 빵옥이를 내 방에 들였고
빵옥이는 내 옷을 입고서야,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날 빵옥이는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매워서 먹기 힘든 김치도 색색 거리며 먹고, 엄마가 금세 부쳐 준 계란말이도 남김없이 먹었습니다.
저녁 먹고 해야 하는 받아쓰기 숙제도 그날은 미뤘습니다. 엄마가 특별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빵옥이 덕분입니다.
우리는 내 방 이불 속에 들어가 끝말잇기와 수수께끼를 하며 놀았습니다. 종이 인형을 꺼내 옷을 갈아입히고, 신나게 나들이를 떠나는 놀이에 푹 빠져 있을 때쯤,
어른들 목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왔습니다.
여수 할머니가 빵옥이를 찾으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엄마에게 연신 고맙다며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만옥이는 거북이가 목을 집어넣듯 이불속으로 파고들었지만, 결국 할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만옥이가 돌아간 뒤, 나는 늦은 숙제를 하느라 엄마 방에서 졸다 깨다 했습니다. 그때 희미하게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자꾸 남의 물건에 손을 댄다네요. “돈을 쥐여줘도 그러고…”
“그 애 아빠가 그 뉴스에 나온 사람 아니야?”
“쉿, 애들 듣겠어요. 어린애가 무슨 죄예요.”
다음 날부터 만옥이는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왔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마치면 동네 입구 문구점에 들르기도 했습니다
“은이야, 여기 있는 거 다 갖고 그지?.”
“응, 이 수첩 좀 봐. 너무 예쁘지?”
그때 나는 《말괄량이 삐삐》와 《산적 딸 로냐》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린드그렌 선생님의 책 속 주인공은 모두 씩씩하고 혼자서도 잘 웃는 아이입니다. 나도 그런 아이가 주인공인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날, 비석 치기를 하다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사치기 놀이는 어떤 돌을 고르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너무 두꺼우면 멀리 던질 수 없고, 너무 납작하면 쉽게 넘어져 세우기도 어려웠습니다. 아이들 모두 좋은 돌을 고르려고 공터를 뛰어다녔습니다.
“내가 먼저 봤어.”
“아니야, 내가 먼저야.”
빵옥이와 내가 동시에 돌을 잡았습니다. 서로 놓지 않으려 당기고 밀쳤습니다.
나는 넘어졌고 무릎이 깨졌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습니다.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습니다.
“너 아빠 닮아서 도둑질이나 하지. 그래서 전에 살던 데서도 쫓겨났잖아.”
순간, 공터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습니다.
만옥이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돌이 떨리더니, 그대로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앞이 번쩍였습니다. 피가 흘렀습니다. 엄마는 놀라 달려왔고, 나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몇 바늘을 꿰맨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동네 아줌마들이 하나둘 모였습니다.
만식 엄마, 성동 엄마, 미애 엄마, 남숙이 엄마까지 그러나 여수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집 애라잖아.”
“한두 번도 아니고, 문구점 물건 없어질 때마다 그 애야.”
“그리고 돌로 애를 때려요? 아이고, 무서워라, 피는 못 속인다니깐.”
그 말들은 내 가슴을 차갑게 눌렀습니다.
내가 먼저 밀었다고, 만옥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만옥이는 우리 놀이에서 사라졌습니다.
한 달쯤 지나, 만옥이가 다시 엄마 있는 곳으로 간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엄마는 후련하다고 했습니다. 병원비 문제로 여수 할머니와 마음이 상했다는 이야기도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떠나기 며칠 전, 만옥이는 우리 집에 왔습니다. 철문 사이로 보이는 작은 발을 보고 문을 열자, 그날 처럼 또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습니다.
“아팠지.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만옥이는 분홍색 열쇠고리가 달린 수첩을 내밀었습니다.
내가 갖고 싶어 하던, 그 비싼 수첩이었습니다.
나는 순간 파지를 줍는 할머니 등이 생각났습니다
빵옥이가 당황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습니다
“엄마가 준 돈으로 샀어. 훔친 거 아니야.”
“이거 받고… 나 여기 살게 해 주면 안 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엄마를 졸랐습니다. 밥도 먹지 않고, 학교에도 가기 싫다고 떼를 썼습니다. 엄마는 결국 동네 아줌마들에게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성동 엄마와 여수 할머니가 크게 다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구점 물건이 또 없어졌답니다.
그날 밤, 만옥이는 아무 말 없이 떠났습니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채로.
지금도 오래된 수첩을 펼치면, 바싹 말라버린 아카시아잎 하나가 떨어집니다. 어릴 적 만옥이가 눌러 두었던 작은 압화입니다. 볼이 빵빵하던 만옥이 남긴, 훔치지 않은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