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바라다

by naeun

열병을 앓았습니다.

땀이 식은 자리에 새벽 공기가 스며듭니다. 일어나 차를 끓입니다. 손때 묻은 찻잔을 꺼내 차를 마십니다. 유약이 고르게 발리지 않아 울퉁불퉁한 찻잔입니다. 이 찻잔은 몇 해 전 친구에게 선물 받은 것입니다. 직접 빚어 구운 것이라며 건네주던 날, 그는 말했습니다. 흙이 물을 만나 형태를 얻고, 마르는 시간을 지나서 불을 통과해야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고. 가마 안에서는 온도를 낮출 수도, 멈출 수도 없어 다만 견디는 일뿐이라고.

가끔 이 찻잔에 차를 마십니다. 불을 지나온 것의 온기를 손에 올려둡니다. 진실이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몸은 괜찮아졌지만 마음 한쪽에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남아 있습니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글을 씁니다. 먼지처럼 유영하던 생각들이 문장 속에 가라앉습니다. 흙을 다듬듯 문장을 고칩니다. 세상이 설명해 줄 거라는 기대도 거둡니다. 내 안의 형체 없는 것들을 끝까지 따라가면, 내가 나를 알아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을 내 쪽으로 천천히 끌어옵니다.

어린 날, 옳지 않다 여긴 일 앞에서 겁이 났지만 도망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후회하지 않겠냐 물으셨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저 내 말을 믿으셨습니다. 그 믿음은 불이었습니다. 나를 태우려는 불이 아니라, 단단하게 만드는 불. 그때 이미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불을 지나야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불 앞에서 내가 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군가 정해둔 온도가 아니어도 됩니다. 식어가는 온도까지, 내 것이면 충분합니다.

창밖은 아직 어둡습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고, 아무것도 나를 재지 않는 시간. 이 고요 속에서 나는 글로 나를 더듬습니다. 형체 없이 떠도는 것들을 문장 속에 가두고, 나를 붙잡습니다.

내 어머니는 평생 글자를 모르셨습니다. 글도 말도 없이, 어머니는 어떻게 자신을 잃지 않으셨을까요. 마음속에 가마 하나를 품고, 아무에게도 쏟아내지 못한 것들을 담은 채로 뜨겁게 살아오셨을지도 모릅니다. 그 무게 속에서 어머니는 읽고 계셨겠지요. 새벽 시장 바닥의 온도를, 아이들 얼굴빛을,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과 글 바깥의 언어로, 어머니는 세상을 다 읽으셨겠지요.

열이 펄펄 끓던 밤, 나는 어머니의 거친 손이 그리웠습니다. 그 손은 흙을 만지는 사람의 손처럼 거칠었지만, 쉽게 부서지지 않는 온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그 손을 떠올리며 식어가는 찻잔을 손에 쥐고 앉아 있습니다. 나는 아직 가마를 통과하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괜찮습니다.

다만 이 새벽의 고요가 어머니에게도 한 번쯤은 닿았기를, 가만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