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증명_최진영_은행나무

나의 증명 /나은/

by naeun

계단 위에 홀로 선 문이 보인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 오후 해질 무렵일까. 다행히 문은 열려 있다. 나는 그 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간다.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첵 표지에 <구의 증명>이라는 제목을 보며 '구'는 숫자를 뜻하는 말일 거라 짐작했다. 증명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그러나 구는 이 책의 주인공 이름이다.


존재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은 주인공, 그는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 걸까?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인생은 쓸쓸하다.


구는 첫 장에서부터 죽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이별은 대부분 죽음이다. 이모도, 노마도, 그리고 구도.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 담은 그 죽음을 목도하며 남겨진 인물이다. 작품 전체에는 남겨진 담이와 구가 나눈 사랑, 그리고 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고여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짧고 건조하며 절제된 문장 덕분이다.


덜어낼수록 더 선명해지는 문장들이다. 없애고 줄였는데 오히려 더 아프다. 그래서 이 책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나는 울었다. 울면서도 모르는 게 죄냐고 물었다. 이모는 대답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서는 대답이나 설명보다는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고"


작가 최진영을 처음 만난 건 산문집 <어떤 비밀>을 통해서다


그 책에는 온기가 있다. 계절이 바뀌는 순간의 특별함, 엄마와의 기억, 고양이의 발소리 같은 것들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글이 마음에 들었다. 간결한 문장과 힘 있는 필체가 따뜻함이 먼저 떠오른다.


이 소설은 다르다. 설정이 괴기스럽다.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슬픔이 흐리고, 그 속에 냉기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한 같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것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 사라짐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그 마음 아래 너와 나의 삶이 담겨있다.


"나는 구의 삶을 말리 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부모가 물려준 세상이었다." (p.149)


구는 부모가 남긴 빚 때문에 사채업자들에게 맞아 죽는다.


가난을 물려주고 사라진 부모,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은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상. 구가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p156)


책 속에서 담이가 구의 몸을 먹는다는 설정이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거부감이 먼저 올라왔다


그러나 담이의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훼손이 아니라 사라짐을 견디지 못한 몸무림이다.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해, 그녀는 끝내 구를 자기 안에 들여놓는다. 구가 증명되는 순간이다.


괴기스러움이 아니고 안쓰러움이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고,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p.151)


소설은 사랑을 꾸미지 않는다.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흔들리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냉정한 현실 앞에서 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설명한다. 구를 죽인 건 세상이다. 읽는 내내 구의 등을 쓰담듬어 주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히 담이가 있었다. 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싶어었었던 이유. 담은 구의 삶의 가치이었고 그가 살아있었다는 유일한 증명이다.


그리고 이제 할 수 있다면 우리가 구의 증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약한 이들의 사랑과 이별을 통해 작가가 날리는 묵지한 물음에 책을 덮고도 한참을 떠나지 못했다.


문을 지나 구는 노마와 이모를 만났을까?


담이를 두고 가는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얼마나 뒤를 돌아봐야 했을까? 그의 몸은 오랫동안 담의 몸속에 돛단배처럼 유영할 것이다


그것이 구의 증명이자 담의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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