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니가 보고 싶어

by naeun

이제 열 살이 된 딸아이가 아침부터 이가 흔들린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입을 벌려 보라 하니 윗니 하나가 금방이라도 빠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 그 옆으로는 작은 이 두 개가 한 곳에 포개져 올라오고 있었다. 흔들리는 치아 옆으로 덧니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치과에서 “다른 이도 하나 더 뽑아야겠어요”라는 말을 듣자, 아이의 눈에는 금세 걱정이 가득 찼다.
그러더니 이어 말하길,

“그럼 튜스페리한테 이를 두 개나 줘야겠네?!”

“튜스페리? 이빨 요정? 까치가 물어가라고 지붕에 던지는 게 아니고?”

젖니를 지붕 위에 던져 까치에게 맡기던 내 어린 시절과 달리, 베개 밑에 이를 두면 선물을 주고 간다는 ‘이빨 요정’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아이 사이에서 묘한 세대 차이를 느꼈다. 하긴, 이를 실로 묶고 이마를 ‘탁’ 쳐 빼던 나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아이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까치 밥 하라 던져 줄 지붕도, 까치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아닌가.

덧니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웃을 때 딱 보일 자리에 밥풀처럼 박혀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덧니가 예쁘기로 유명했던 연예인 한 명이 떠올랐다. 어느 날 그녀는 치아를 교정한다며 그 덧니를 뽑아냈고, 더 예쁜 ‘아이돌 미소’를 가지게 되었지만 예전의 그 특별한 매력은 사라진 듯해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미디어는 매끈하고 화려한 것만을 끝없이 쏟아 낸다. 더 과하게 말하면, 정해진 기준의 ‘예쁨’에서 벗어나면 게으르거나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시대다. ‘비포 앤 애프터’를 유혹하듯 보여 주며, 깎아 낸 뼈 조각까지 서슴없이 전시하는 세상.

그런 세상을 살아가야 할 내 아이에게, 아직 어찌 자랄지 모르는 덧니를 미리 뽑아 주는 것이 위생상·미관상 좋을 거라는 생각이 스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큰 건강상의 문제가 아니라면, 조금 두고 보고 싶다는 마음이 조용히 올라왔다.

예전에 한 배우가 인터뷰에서 말했다.

“시간의 흐름대로 자연스레 생기는 주름으로 연기하고 싶어 어떤 시술도 받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난 뒤로 나는 그 배우가 나오는 작품을 꾸준히 찾아본다. 시간과 함께 쌓인 자연스러움이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말 ‘아름답다’의 어원은 ‘나(我)’와 ‘답다’가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의 시작은 결국 ‘나다움’이다.

천편일률적인 아름다움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게다가 그 ‘나다움’이라는 것이 외모 하나로 결정되는 게 아닌것도 더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아이가 눈에 보이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사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끝에서 문득, 보고 싶어졌다. 웃을 때 살짝 드러날, 내 아이의 덧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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