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저는 감정이 수시로 진폭이 크게 요동쳐요.”), 사회 불안증(“사람들과 눈을 잘 못마주치겠어요.), 공황장애(“심장이 가끔 너무 두근 거리고 당황하면 질식할 것 같아요”),
식이장애(“감정 조절이 안될 때면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기도 해요),
편집증(”사람을 잘 못믿겠어요), 등
“총체적인 난국”으로 스스로를 지칭하고 자가진단을 내린 채, 증상으로 자신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인 것 같은 각각의 문제들은 하나의 연결점을 중심으로 돋아나고 있었다. 바로 엄마와의 관계 속 상처 감각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식이장애’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가 자신에게 가한 침해와 만행들이 상담의 주로 주제로 떠올랐다.
엄마는 딸의 이야기 맨 첫 문장부터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상담실에서 딸을 만나기 위해 그녀의 엄마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엄마의 강력한 목소리와 응시들이 빚어낸 딸의 실루엣과 동선들을 보면서 엄마의 이야기에 가려진 딸의 이야기를 잘 꺼내어 가는 것이 이 상담의 목표였다.
C: 엄마는 음식을 강요하곤 했어요. 잘 먹이는 엄마로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싶었던 거에요. 본인이 음식 솜씨가 좋으니까. 그렇게 음식으로 자기 아이들을 살찌우는 것이 동네에서 제일 가는 엄마를 만드는 거니까요.
저는... 그러니까 엄마의 걸어 다니는 증거여야 하는 거에요. 근데 또 황당한 건, 살 찌는 음식을 잘 먹되, 살은 찌면 안 되는거에요.
‘여자는 살찌면 안 된다..’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엄마가 주는 음식 다 먹고, 맛있게 먹고, 건강해 보이되 살은 찌면 안 되는 거죠. 그리고 애석하게도 저는 엄마의 날씬한 유전자를 물려받지 못했어요. 그 유전자는 동생한테 갔단 말이에요. 저는 물만 먹어고 살찌고 게다가 소화기관도 안 좋게 태어났는데 계속 먹으라고 강요 받았었어요.
엄마의 욕망과 엄마의 사랑 방식, 그리고 엄마의 규칙은 강하기도 했지만 모순적인 점이 많았다. 그 모순과 강렬함을 처음에는 몸으로 다음에는 의식적으로, 깨닫는 순간부터 그녀는 차츰 자신이 엄마의 매개 이거나 마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싶어했다. ‘나는 좋은 엄마다..’의 표상을 실천하고 ‘나는 나쁜 엄마’를 가리기 위한 엄마의 매개이거나 마개.
엄마의 욕망이 강한만큼 엄마가 대놓고 그 욕망에 맞춘 강요를 하는 그만큼, 그녀는 열심히 엄마의 욕망을 무너뜨리고 실망시키는 데에 총력을 다 했다.
C: 엄마는 저에게 필요한 사랑은 주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결과를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빚독촉을 받는 기분도 들고요.
엄마의 음식은 그녀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침투였다. 하지만 어리고 엄마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그녀에게, 그래서 때로는 스스로를 엄마에 비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보게되는 그녀에게 ‘거부할 권리’라는 것은 그녀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휘두를 수 있는 엄마를 약올릴 수 있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최대치의 정신적 무기나 다름 없었다.
그녀는 열심히 엄마의 음식을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엄마의 음식을 먹더라도 파를 골라냈고 음식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엄마의 욕망을 순순히 들어줄 수는 없었다. 엄마는 음식을 거부하는 그녀를 달래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면서도 그녀를, 그녀를 잘 먹이기를, 절대 포기하지 못하셨다. 더 열심히 음식을 통해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고, 그 사랑의 형태와 결실이 딸의 모습에서 전시되기를 바라셨다. 엄마가 살아면서 다양한 대상들과의 관계에서 또 여러 삶의 공간 속에서 거부되고 좌절된 욕망들을 담기에 집은 너무 작고 초라했고 음식은 엄마가 그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 속 활동이자 작품이었다. 엄마는 음식을 차리는 행위에 집착하는 만큼 그녀가 음식을 먹는 것에 집착했다.
2. 딸;
나는 엄마를 거부한다.
이 때, 그녀가 거부하는 것은 음식이지만 음식 만이 아니었다.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엄마의 사랑 방식을, 그 일방성과 강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 또 그럼으로써 ‘자기’를 확보하고 있는 것. 그러니까 엄마의 음식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녀가 고수하는, 엄마의 음식을 안 먹을 수 있는 선택권과 파를 골라낼 수 있는 권리에, 먹는 음식의 양과 먹는 시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그 범위 안에서만 그녀는 자유로울 수 있었고 엄마의 행동이 가진 의미의 강도를 그녀는 원초적으로 감지했다. 음식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속에 아주 많은 지분의 그녀가 담겨있었다. 거부는 엄마에게 함락당하지 않을 내 마지막 보루를 사수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3. 딸; 나는 다른 사랑의 모양과 형태를 원한다.
그녀가 원하는 사랑은 다른 모양, 다른 강도, 다른 리듬을 가진 사랑이었다. 그녀의 엄마처럼 확 가까이 다가와 일방적으로 숟가락을 들이밀며 그녀의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점유 해버리려 하는 엄마가 아니었다. 그녀가 거부하든 수용하든 그녀의 공간을 통으로 존중해주는 엄마, 그녀가 거부하더라도 조금 멀찍이서 여전히 나를 바라봐주는 엄마. 그녀의 내면에서 그리고 몸에서 자연히 일어나는 욕구에 따라 그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주는 엄마였다.
불처럼 강렬하게 확 질러버리고 다 쏟아버리는 태워버리는 엄마가 아니라 난로처럼 은은하고 따스한 존재감으로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자신의 선호와 욕망과 강도와 순서로 ‘존재할 수 있게’ 허용해주고 감싸주는 엄마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것을 엄마와의 관계에서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도 자신이 어떤 사랑의 형태를 필요로 하는 지 몰랐고, 엄마도 자신이 아는 단 하나의 사랑 방식에만 집착했다.
엄마는 집요했고 한 방향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들을 향한 사랑 방식이 빗나갈수록 다른 사랑의 방식을 찾기 위해 뒤로 물러나 자신의 사랑을 다시 살펴보기보다는 좌절된 마음으로, 더 열심히 하던 방식을 고수하며 상대를 점유하려 했다. 그만큼 엄마에겐 엄마의 방향과 움직임을 붙잡아줄 옆의 대상, 뒤의 대상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엄마는 그저 앞의 대상을 향해만 나아가는 움직임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침의 식탁은 언제나 전쟁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사랑이 딸의 식이장애를 야기시키고 강화시키는 원인인줄도 모르고 음식을 거부하는 ‘딸의’ 장애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한다. 노력할수록 엇나가는 관계와 멀어지는 마음이 두 사람 사이에서도 딸의 내면에서도 계속된다. 엄마와 딸의 관계가 먹이고 먹지 않는 침투와 거부의 순환관계로 축소되어버리고 만다.
4. 엄마: 너를 통해 나를 느낀다.
엄마는 또 그러면서도 딸이 재잘재잘 명랑한 딸이길 바랬다. 밝고 명랑하고 구김없는 성격을 소유한 딸을, 자신이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딸이 밝고 명랑하고 구김없는 성격을 소유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이 소유의 욕구가 엄마가 삶에 느끼는 의욕없음과 기운 빠짐, 재미있는 일이 도저히 없는, 탈출구 없이 꽉 막힌 시들한 삶에 대한 반응임을 알고도 몰랐다. 엄마는 그저 딸이라는 존재가 뿌려주는 일상의 활기를 기대하며 딸을 낳아 길렀다.
엄마에게 타인은 둘로 나뉘었다. 자신의 욕구를 들어주는 존재와 들어주지 않는 존재. 가족은 이 욕구의 강도가 강해지는 타인이자 거의 자기 자신이었다.
엄마에게 있어서 딸이란, 자신의 마음을 들어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 상식으로 공식처럼 박혀 있었기에 엄마는 딸이 그날의 일을 재잘재잘 읊어주지 않을 때 실망하고 화를 냈다. 유치원에서 돌아와서든, 학원에서 돌아와서든, 남자친구와의 첫 데이트에서 돌아와서든, 언제든 딸이 자신을 채워주기를 기대하고 요구하고 불평하는 일들이 엄마가 딸을 바라보는 마음 속에 계속 불만의 방향으로 쌓여갔다. 그리고 엄마는 그 불만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딸의 마음을 생각해서 감춰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5. 엄마; 그런 딸을 거부한다.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서 찌뿌둥한 얼굴로 엄마에게 짜증을 내거나 엄마가 해준 밥을 불평하는 딸을 견딜 수가 없었다. ‘너마저’의 실망감과 짜증으로 딸이 자신에게 건네주어야 했을 삶의 활기와 기운 대신, 딸이 표현하는 일상의 불편한 감정들을 그냥 들어줄 수가 없다고만 계속 이야기 했다. 아마도 엄마는 딸에게서 부모를 기대하는 것도 같았다. 딸은 자신이 엄마를 채워주어도 받은 적 없는 것처럼 ‘더’를 요구하는 엄마에게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할 지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한다. 언어 밖에 있는 복잡한 감정 이전의 감각들을 견디다보면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가 들려온다.
“너는 왜 이렇게 매사에 부정적이니?” 하지만 엄마는 자신을 몰랐다. 딸의 부정성에 집중하는 자신의 더 큰 부정성을, 딸의 긍정성으로 자신의 부정성을 메우려는 시도를, 그 결핍과 기대가 점철된 자신의 마음을. 자신을 몰랐기에 자신을 모르는 그만큼 딸의 마음을 헤아려 볼 줄 몰랐다.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그만큼 딸이 자신을 위로해주지 않는다고 딸의 부정성을 탓한다. 그래서 자신을 위로해주는 딸을 기다리며 엄마는, 엄마의 위로를 기다리는 딸에게, 딸의 텅빈 마음에 말할 길 없는 언어의 부재에, 오히려 자신의 부정성까지 밀어넣으며 딸의 입을 닫게 한다.
“너가 의욕없고 너가 불평이 많고 너가 나를 힘들게 한다.” 고 선언한다. 그렇게 원래의 순서를 지워버린다. “내가 우울하고 내가 기운 없고 내가 힘겹다”는 사실이 먼저였고 우선이었음을 딸의 뒤로 안으로 숨기고 접어둔다.
“다른 딸들은 안 그런 다는데 딸 키우는 보람이 없고 인생이 서글프다”고 딸을 들어 자신의 삶을 비관한다.
6. 딸;
아픈 말은 그 깊이가 깊고 오래간다
엄마의 이런 이야기, 위에서 아래로 꽂혀오는 어른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 아이는 엄마의 불행 서사 앞에서 감정적으로는 움찔하고 억울하지만, 모든 위에서 아래로 꽂혀오는 자주 듣는 이야기가 그러하듯, 받아들이지 않는 듯 하면서도 더 깊이 받아들이게 된다. 여리고 물렁한 아이의 마음 속에 진통으로 기입된 아픈 말은 그 깊이가 깊고 오래간다. 아프게 박힌 말은 쉽게 빼내고 무시하기가 어렵다.
딸은 엄마에게 들은 이 말과 비슷한 말이거나 엄마가 자기 마음에 뚫어놓은 아픈 마음의 통로와 결이 비슷한 말을, 더 크게 더 강하게 듣는 마음의 경로를, 가진 줄도 모르고 가지게 된다. 딸의 마음 속에서 주어들이 잘린 이야기들이 둥둥 떠다닌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결 같은 작은 말에도 이 이야기들이 건드려져 마음은 금세 부정적인 색조로 물들고, 그런 상처 때문에 마음 아플 때는 위로가 필요하기에, 또 이런 상처감각의 일부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기에, 힘겨울 때마다 딸은 엄마에게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하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예전에도 그랬든, 마음의 선을 그으며 말한다.
넌 너무 예민하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마라.
7. 딸;
받아들이는 동시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역시 딸은 이 말도 받아들이는 동시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안으로 받아들이지도 삼키지도 못한 소화되지 않는 말들이 딸의 몸과 마음에 더 많이, 더 자주, 엄마와의 관계에서든 엄마 이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든 쌓여간다. 엄마와의 관계가 힘들었다보니 엄마 밖의 관계에서도 엄마의 말은 더 자주 더 쉽게 울려 퍼진다. 그것이 애초에 엄마의 말이었는지, 다른 사람의 말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중첩된 상처 감각들의 중첩된 경험들이 더 많은 것을 그녀 안에서 중첩시킨다.
세상에는 엄마 같은 사람도 있었고 엄마와 다른 사람도 있었지만, 좋은 말은 마음에 달라붙지 못하고 어떤 말이든 혼란 속에서 듣다보니, 엄마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 크게 들려와서 다른, 좋을 수도 있었던 경험들을, 부정적으로 물들이기도 했다.
상처의 말들은 들으면 그 뾰족함에 아프게 들렸기 때문에, 마음이 아플 때면 아픈 그곳을, 또 그곳만을 전부인것처럼 바라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딸의 마음 속 상처의 자리에 엄마의 상처가 되는 말들과 행동을 둘러싼 그 자리에 더 많은 말들과 행동들이 달라붙었고 언젠가부터 그녀는 이것이 엄마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상처받아 혼란스런 마음에는 여러 혼란들이 더 쉽게 겹쳐오고 덮쳐왔다. 그럴수록 더더욱
‘정말 내가 예민한 것인지도 몰라. 정말 내가 문제인가봐’, 의 감각에 더 몸서리 치기도 했다.
8. 엄마 ;
너를 통해 나를 채운다.
딸을 통해 자신을 채우려고 했던 엄마는, 또 딸이 문제라고 판단하게 된 엄마는, 딸의 식단과 딸의 성격,딸의 취향, 딸의 공부, 딸의 친구 선택에도 마음의 팔을 뻗쳐왔다. 엄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서 그것을 어떻게 얻어갈 수 잇는 지에 대한 현실적인 범위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에, 그러면서도 딸을 위한다고 자기 마음도, 딸의 마음도 착각했기에, 엄마는 무작정 딸이 공부 잘하기를 강요하기도 했다.
‘너가 공부 잘하면 좋다’ ‘너를 위해 공부를 시킨다’는 형태로 돌려서 또 그녀에게 공부를 강요했다. 딸도 물론 공부를 잘하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공부를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딸의 자발적인 동기가 일어나기도 전에 엄마의 강력한 결핍동기로 들어온 공부에 대한 욕구는, 딸을 숨막히고 기운 없게 했다. 딸은 되도록 빨리, 엄마의 욕구를 좌절시켜야 만이 숨 막히게 밀고 들어오는 엄마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간파했고
9. 딸;
음식이 밀고 들어왔을 때처럼 공부를 거부했다.
엄마가 함유된 것은 무엇이든.
엄마는 매를 들고 왔지만 그것도 무서웠지만, 그녀는 오늘의 매보다 ‘내일의 매’가 더 무서웠다. 오늘 이만큼을 들어주면 일방향밖에 모르는 엄마가 내일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을 경험적으로 원초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게 엄마의 계속된 욕망과 행동의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공부를 잘하는 딸을 원하는 엄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공부를 못하기는 딸이 되기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사선을 지키는 노력이었지만 자신도 왜 그러는 지 몰랐다. 차라리
‘너는 머리가 나쁘다.
너는 아무리 해줘도 결과를 낼줄 모른다.’ 를 수용하는 편이
‘너는 조금만 더 하면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된다. 잘할 수 있다. ’보다 더 낫다는 것을 그저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격려나 칭찬이라도 결국 엄마의 블랙홀과 같은 욕망에 연결된 격려와 칭찬이라면 어떻게든 분별심을 가지고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내면의 좋은 면을 허용할 수도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고 그것을 꺼내어 나눌 수없었다. 누군가 칭찬을 해주거나 격려를 해주어도 그 의도와 진실성을 의심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 개념과 다르게 자신을 좋게 보아주는 타인의 시선도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그래서 또 사람들과 교류를 하는 것이 두려웠다. 자신이 분위기를 망치거나 저해시킬 까봐.
10. 딸 ;
긍정을 허용할 수 없기에
부정의 회로에 갇히다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이 사회불안과 선택적 함구증 이었다. 나쁜 경험이 안으로 많이 쌓인 그녀는 내면에서 자연스레 좋은 것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말할 수 없기도 했지만, 좋은 말만 내어놓으라는 엄마, 없는 좋음을 만들어서라도 세상에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엄마에 맞춰줄 수 없기에, 마음 속에서, 좋은 마음이 올라오는 것도 경계하고 비밀로 봉인해두기도 했다. 그럴수록 안과 밖의 통로가 막히고 자기 내면의 부정성, 그 폐쇄 회로 안에 더 갇히기도 했다.
그럴 때 그녀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삼키기와 토하기, 였다. 엄마와의 관계에서는 ‘거부하기’, 가 엄마가 자신에게 주는 단 하나의 사랑 방식에 대응하는 것이었다면, 한 번에 삼키기와 한 번에 토하기는 그 사랑의 폭력성에 대항하는 자기 위로의 방식이었다.
음식은 그녀의 몸에 원초적인 위로이자 폭력이자 혼란이자 갈등이었다. 엄마로 상징되는 모든 것이자 엄마 경험 그 자체였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음식으로 삼키며 달래고 그리곤 다시 자신을 싫어하며, 자신이 지금가지 들어왔던 온갖 상처주는 말들이 울려퍼지는 마음의 익숙한 오래된 레코드판을 들으며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내가 싫다.
감정조절도 못하고 몸조절도 못하고 아무것도 조절못하는 내가 싫다‘
하지만 그녀의 먹고 토하기의 순환은 그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함께(관계)의 아픔에 대한 반응 양식이자, 조절될 수 없는 것을 조절해내려 하는 혼자의 필사적인 시도였다.
11. 완강한 모름과 전방위의 아픔
;상처 민감성과 상처 감수성
딸이 그린 엄마의 그림은 엄마가 자신의 소망과 욕망 결핍을 딸에게 투사해온 그림의 반사물이었다. 투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랑하기에 투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모든 투사는 조금씩은 일방적이다. 어떤 엄마의 사랑이든 어느 정도는 기울어져 있고 일방적인 면이 있다. 누구든 자기 결핍으로 자기 욕망으로 미끄러져 타인의 권리나 존재를 모르고 침해하고 밀어버리기도 한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 속에서 일어나는 상처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해 속에서 서로 보듬어지고 오히려 관계는 돈독해진다.
우리는 같기에 친밀한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할 수 있기에 친밀해진다. 하지만 이 엄마는 하나의 방향밖에 모르는 직진의 움직임만을 가지고 딸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일방향성이 만든 폐허가 광범위하고 깊었다.
그래서 가족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상처민감성과 상처감수성이었다. 내가 상처줄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 내 사랑이 상처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이런 자기 방향성과 움직임에 대한 인식과 이해, 그리고 자신의 방향성과 움직임이 상대에 상처가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상처 민감성과 상처 감수성이중요했다. 자기 결핍을 바라볼 의지와 딸이 자신에게 상처 받을 수도 있음에 대한 수용이 자신이 딸에게 가한 상처를 사랑으로 다시 품을 수 있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또 언제나 엄마보다 관대했다. 엄마가 인식해주면 그 상처를 엄마와의 관계에 도 자기 안에서도 소화해나갈 힘과 의지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언제나 일방향적이었다. 정말로 딸을 미워해서도,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나르시스트여서도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침범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하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그 완강한 모름,이 서로를 전방위로 아프게 했다.
여기까지, 가
그녀와 함께 지난 ‘식이 장애’를 분석하며 엄마의 공격과 침투에 방어적으로 구축된 내 내면의 폐허를 바라보며 우리가 함께 알게 된 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내면 깊숙한 마음의 협곡과 해안선마다 엄마가 강하게 심어넣은 표정들과 말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엄마의 폭력으로 인해 온전한 자기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마음의 협곡과 해안선이 그녀의 엄마가 얼마나 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 내면의 어떤 움직임이든, 그녀가 증상으로 앓고 있는 어떤 마음의 움직임이든 그것은, 그녀에게 가해진 이 모든 보이지 않는 폭력과 그 폭력에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며 자기를 구축해온 방어적 자기를 또렷이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증상 속에 자신을 숨겨놓은 한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증상은 단순히 상처 받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구축되는 마음의 최전방의 방어선이었다.
12.
엄마와의 관계를 견디기 위해
그녀는 증상을 필요로 했다
만약 엄마와 딸 사이의 분리와 연결의 공간이 충분히 있었다면 그녀는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아이'가 되거나 '엄마 말을 안 든는 사이' 둘 중 하나를 유연하게 선택해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욕망이 곧 나여야 한다는 압력, 그 사이의 공간감이 허용되지 않는 엄마의 일방향성은 그녀에게 무척이나 숨막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엄마의 욕망대로 빚어지는 아이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삭제해야 하는 일이 되는 것.
그녀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엄마 앞에서 가진 거의 유일한 선택은 욕망에 맞서는 일, 그렇게 욕망의 긍정적인 면까지 거부하는 일이었다. 자기 안의 긍정적인 부분까지 이렇게 지워졌다. 그래서 그녀는 증상 속에 자기를 놓아두고 증상을 방패로도 간판으로도 그리고 자신이 일상을 견뎌가는 데에도 사용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증상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문제 해결의 실마리였다. 그녀가 얼마나 약한가,가, 엄마가 끈질긴가,가 아닌, 그 모든 강렬한 끈질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켜내는 그녀의 힘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의미했다.
그녀는 '왜 나는 이런 증상들을 가지고 있는가(왜 나는 온통 나쁜가)?'를 들고 상담실에 왔지만, 나는 그 질문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왜 스스로에게 어떤 ‘좋음’을 허용하지 못할까?
자연스레 일어나는 식욕과 기분과 의욕을 허용하지 못하는가?
자기 안의 좋음과 자기 자신 사이의 편안한 관계를 가로막는 엄마의 일방향적인 욕망과 압력이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선택은 좋은 것 혹은 나쁜 것, 사이가 아닌, 자기와 엄마 사이의 선택이었기에 좋은 것을 있는 그대로 선택하고 허용할 수 없었다.
그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선택에 내몰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증상 속에 자신을 숨겨두는 것이었다. 자신의 '좋음'을 받아들여가고 펼쳐갈 수 있는 공간은 엄마 없는 곳에서, 엄마가 아닌 세상 속에서 앞으로 충분히 발견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에겐 엄마 덕분(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좋은 가치를 수용하는 동일시)도 엄마 때문(역동일시)도 아닌 엄마를 초월한 다른 세상과 움직임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자신을 위한 다른 실험을 해볼만한 충분한 공간과 시간이었다.
13. ‘엄마의 딸이 되지 않기 위해’에서 _ ‘내가 오롯한 나’ 이기 위해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기울어져 있던 몸을 뒤로 하며 그녀와 나 사이의 공간감을 충분히 확보했다.
T: 나는 절대로 당신이 원하는 그런 딸이 될 수 없다, 에만 반응해온 삶이에요. 엄마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나 역시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연출해내야 했던 거에요.
힘껏 몰라야 하고
어떻게든 안 먹어야하고
어떻게든 잘 못해야 하고
어떻게든 나를 부정해야 했던 거에요.
하지만 그건 결코 진짜 내가 아니에요. 그저 딸임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도 나를 거부하게 되었어요. 엄마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만큼 나를 거부해야 하는 마음의 면적 역시 많이 소요된 거에요.
엄마가 자기 삶의 무게를 나에게 지우고 의존하며 자기 감정이나 자기 결핍 자기 책임을 스스로의 삶속으로 거두어가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고 들어오기만 하기 때문에 나는, 이 관계에서 한번도 엄마가 먼저 뒤로 물러 나는 움직임이나 멀리서 안아주거나 뒤에서 따스하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엄마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아직은 나를 믿을 수 없어요.
엄마를 믿을 수 없는 만큼 나를 믿을 수 없었던 거에요.
그만큼 나는 엄마가 나에게 지워놓은 생의 감각들 분위기들 그 세계에만 반응하며, 살아온 시간이 길었어요. 엄마의 딸임을 거부하기 위해 나를 거부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게 내 힘, 거부해내는 힘이기도 했어요. 엄마에게 함락당하지 않기 위해 무기력도 학습해서까지 나를 지켜온 거에요.
내 모든 세계가 엄마라는 한 사람의 실루엣에 맞춰서만 반응할 때는, 엄마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나조차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 안 되었어요. 그게 어쩌면 내 힘이기도 했어요.
T: 엄마는 인정하지는 않으시지만 자기 삶을 J씨에게 정말 의존해서 살아오셨어요. 나 역시도 엄마의 의존성에 반응하느라 엄마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누군가에게 분노하며 의존하게 되기도 하거든요.
엄마에게 분노하는 것도 필요하기도 할 거에요. 하지만 우리 그 분노조차 조금 옆으로 두면서 방향성을 조금 더 다양하게 만들어가며 앞으로 나아가 볼까요? 엄마의 움직임에만 반응해온 시간 동안 내 안에 엄마가 너무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어서 하나씩 떼어낸다는 건 정교함과 정밀함을 그리고 긴 내면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인 것 같아요.
나는 또한번, 그녀에게 말하느라 나도 모르게 앞으로 향하던 자세를 바로 잡고 우리 사이에 충분한 공간감을, 그리고 우리 곁에 난로를 두는 마음으로, 말했다. 앞으로의 긴 대화를 예비해두며.
엄마를 거부하기위해 나를 거부하는 대신, 엄마와의 관계에서 가닥가닥 맺힌 방어적으로 구축된 자아의 실루엣 대신, 내가 뻗어가고 싶은 나의 연결선을 이제부터는 이어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