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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안남 Nov 12. 2024

01. 상처의 불

부모 그림자를 치유하는 육아 상담소


[육아 상담의 과정을 담은 책을 쓰면서,


상처의 불, 불의 속성,을 꼭 넣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의 상처는 화상을 입히기에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실은 불은 물질의 화학변화, 내면의 화학변화를 통해 성질을 바꾸고 우리가 잘 활용하기만 하면

빛과 온기로 화하여 결국 우리에게 도움이 되니까요.


그 불의 활용법을 함께 모색해볼까요~ ]









소영씨는 37개월 남자아이의 엄마로 산후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이가 어려웠고 육아가 두려웠다. 엄마에게 받은 상처가 매일, 아이와 자기 사이에서 수시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담실에 온 첫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얘기했다.



“그래도 저는 잘할 수 있을지 알았어요. 제가 엄마가 되면 다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저도 저의 엄마랑 똑같이 할 때가 있어요.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소리를 지르게 되요. 그 때마다 소름이 돋고 제가 미워지고 아이를 키워나가기가 무서워져요. 계속 어차피 계속 상처 주게 될텐데. 이것을 평생 계속 해나가야 하는 것이 자신이 없어요.”


그녀의 엄마는 언어적으로 정서적으로 폭력인 분이셨다. 밖에서는 상냥하고 부드럽지만 집에서는 아빠도 언니도 그 누구도, 엄마의 날카로운 말화살을 피해갈 수 없었다.


“엄마의 어떤 점이 특히 더 힘들었을까요?”


“엄마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걸 싫어하셨어요. 그런데 엄마야말로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뭘 어떻게 해도 자기 기분 따라 말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마음에 불을 지르니까 엄마 옆에서 자란다는 게 항상 긴장되고 힘겨웠어요.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는 게, 그게 얼마나한 불화살이 되는지 알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잘 말을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 기분에 못 이겨 분풀이를 하는 엄마가 자기 안에 잠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신도 아이에게 이성을 잃고 불화살을 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아이를 낳아 키우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었다.


“제 밑바닥을 드러내는 일인거에요 육아가. 어떻게든 피하고 싶고 안 보고 싶은 엄마의 모습을 제 안에서 보게 된다는 게 너무 끔찍한거죠. 그게 엄마의 특성이라고 밀쳐놓고 있을 때는 그래도 엄마를 피하면서 살수 있었는데 제가 저를 피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제가 무섭고 끔찍한거에요. ”


그녀에게 육아는, 아이에게 상처주는 뜨거움을 자기 안에서도 자기 밖에서도 수시로 마주하게 되는 일 매일 새롭게 화상을 입는 일이었다.


다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똑같이 하고 있다는 간극. 그 벌어진 내면의 틈 사이로 뾰족한 불화살들이 그녀의 내면에 쏟아지고 있었다. 엄마의 말은 화살처럼, 불처럼 압도적인 모습으로 그녀를 점령했었다. 그런 상처를, 다른 관계도 아닌 자기와 아이 사이에서, 이제 자신이 엄마가 되어, 그 가해자의 자리에서 다시 보게 되니, 그것도 매일같이 보게 되다니, 그 마음 자리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거운가..


“어디가서도 말도 못했어요. 제가 상처 받았다는 것은 그래도 말할 수는 있지만 제가 아이에게 이러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시킬 수가 있는지.. 제가 대체 말 못하는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계속 잘못은 쌓여가고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아이에게 더 큰 상처만 줄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너무 겁이나요. ”


객관적으로 그녀가 아이에게 잘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이게 주는 상처의 파급을 너무 크고 강력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상처의 일방향성만 경험해본 마음이 불러오는 공포였다. ‘한번 상처 주면 그 상처가 계속 될것’이라는 말은, 그녀와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중간에 어떤 복구도 치유도 없이 계속 상처받는 경험만 쌓여왔음을 의미했다. 하나의 상처 위에 또 하나의 상처만 쌓여가는 상처의 중첩만을 경험한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상처의 복구 가능성에 대한 실감’이었다.






1. 그럴수도 있다.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은 ‘그럴 수도 있다’와 ‘그럴 수 밖에 없다’ 였다.


T: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이럴 수가”라는 말 대신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을 나에게 먼저, 그리고 계속 해주기로 해요.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어떤 ‘행동’이든 괜찮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이든 그럴 수도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에요.


일단은 내 안에 있는 어떤 마음이든 허용하고 받아주는 거에요. 그렇게 마음의 품을 넓게 잡아야 그 어떤 마음에 대해서든 앞으로 어떻게 행동으로 표현하고 싶은지 더 찬찬히 살펴보며 선택해갈 수 있으니까요.






2. 나는 엄마와 다르다.


그리고 그녀는 알아야 했다. 자신이 엄마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 그래야 정말로 엄마와 자신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이와 자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과 얼마나 다른가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했다.


T: “내가 얼마나 엄마와 같은지를 느끼기에 마음이 너무 뜨거워서 상처 주었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에요. 나만의 고유한 엄마 경험을 쌓아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엄마니까 나를 단정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이미’ 엄마와 달라요.




3. 상처주지 않기,가 아닌 상처 복구해가기


또 그녀는 상처 받은 마음으로 자신이 아이에게 ‘상처주지 말아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품고 있지만 사실 ’상처주기 않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처 복구 경험’ 이었다.


T: 내가 상처 받은 이유는요, 상처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처에 대한 복구와 연결, 이해와 매듭의 시간이 관계 속에서 주어지지 않았기에 상처가 상처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나는 상처받음의 감각이 그렇게 두려웠던 거에요. 관계가 계속 될수록 더 상처받게 될까봐 더 상처주게 될까봐 그래서 두려웠던 거에요.


아이와 함께 보내는 삶의 시간동안 우리는 분명 이 관계에서 더 상처 받고 더 상처 주게 되기는 할거에요. 우리는 사랑의 사정거리 내에 있는 만큼 상처의 사정거리 내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린 그만큼의 관계 복구를 더 많이 더 다양하게 그리고 점점 더 잘해나가게 될거에요. 회복탄력성은 한 사람의 내면에만 일어나지 않아요. 관계 속에서 다투고 상처받고 밀치고 밀려나고 다시 화해하고 다시 웃으며 그렇게 관계의 끈끈한 힘을 나눠가게 될 거에요.




4. 복구자의 자리에 나를 세워가기




T: 엄마가 나에게 준 상처 감각이 뜨겁다보니 엄마= 가해자 나= 피해자 라는 마음의 공식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이 공식을 해제하지 않고서는 엄마로써도 나로써도 편안할 수 없어요.


C: 하지만 이미 상처를 주었고 계속 상처를 주게 될텐데, 여기에서 어떻게 벗어나나요.


T: 이미 상담실에 오셨잖아요. 피해자의 자리에서 엄마를 가해자로 보고 있는 그 마음이 힘드셔서 그게 힘들어서 오신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의 자리를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복구자의 자리에 두고 싶어서 도움을 요청하신 거에요.


C: 아이에게 상처 주고 사과한다고 그게 제 마음 편하자고 하는 거지, 정말 복구가 가능할까요?


T: 내가 제대로 사과받고 마음이 나아져 본 적이 없기에 하시는 말씀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절대로 상처주지 않기,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기보다는 진심으로 몇 번이고 사과할 마음을 계속 표현하는 것, 그게 더 중요해요. 그러면 관계도 마음도 나아져요


우리의 목표는 상처를 가진 그녀가, 자기 상처에 또 다시 데이지 않고, 상처의 불을 장악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었다. 같은 장면에서 전과는 다른 아주 작은 차이를 만들어가는 일.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될 관계의 의 시간 동안 계속 다른 페이지에서 같은 불을 마음에서 만나게 될 것이었다. 그러려면 ‘한 번에 다 하려 하지 않고 이 장면 안에서 이루고 싶은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건 꼭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나가던, 그래서 빗나가던 반응들을 덜 하게 되는 일. 그 덜 하기의 의미는 깊었다. 처음부터 한번에 다 해낼 수는 없어도 결국 해낼 것이었다.




5. 상처의 불을 제대로 쓰기 위한 거리감 확보




그리고 이제 그녀는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어머니가 되었고 때론 어머니처럼의 마음이 되어버리기도 하므로 어머니로부터의 전면 도주는 이제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그러려면 내 안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잔재라고 느껴지는 이 불을 끄려고 하기보다는 이 불을 제대로 쓸 방법을 살피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불을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보고 억압하려 했지만 억압해둔 마음은 그 통로를 찾으면 더 큰 불길로 한꺼번에 또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불은 태우는 것, 사고를 일으키는 것 이기 이전에 그저 물질의 성징을 바꾸어주는 것이었고, 우리 내면의 불, 그 연소가 가진 진정한 의미는 ‘빛과 온기’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관계는 거리감이 있어야 가능한 것, 상처는 모든 거리감을 없애고 하나로 엉키게 하는 특성이 있었다. 마음이 엉킬 때마다 내 내면의 여러 갈래의 마음과 거리감을 확보해가는 것, 그렇게 내 마음과 관계 맺기를 해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T: 내 안의 불 가운데 어떤 불은 옆으로 피해 가야 하고, 또 어떤 불은 마음의 어두운 영역을 밝혀갈 지혜로 써 나가고 또 어떤 불은 불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성인, 변화시키는 시작점으로 삼아 쓸 수 있을까요?


상처받은 심장으로는 상처 주는 심장으로 이어지기 쉬운 그 어쩔 수 없는 마음의 경로는 인정하되,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그 다음의 의식적인 복구와 회복의 마음 작업을 묵묵히 이어가는 것. 중요한건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였다. 우리가 가진 것은 정말 오로지 지금 여기 현재 밖에 없었다.


T: 그럴 때 무심코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그에 대한 뒤늦은 인식의 지점에서 자기 비난으로 가지 않고 자기 인정으로 향하며 마음을 모으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게 멈춰서 나를 비난하지 않고 왜를 묻지 않고 ‘그렇다면 어떻게’의 지점을 찾아가는 연습을 해가는 거지요.


나의 엄마는 하지 않았던 복구와 봉합, 연결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날도 그녀는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내고는 아이의 작은 실수에 날카로워진 마음으로 몇 마디 내뱉고 나서는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해 진저리를 치며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마음 속으로 다시, 상처의 불화살과 자기 비난의 해일이 몰려오고 있었다. 또 반복되는 일, 또 반복해서 자신을 미워하고 아이를 원망하게 되는 일. 미움과 원망과 오래된 날선 이야기들이 마음 속에서 들고 일어나는 일이 서늘하게 그녀의 내면을 얼어붙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엄마의 시선을 피하며 살짝 눈치를 보았다. 아이가 이렇게 위축된 모습을 보면 더 화가 나기도 했다.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해서. ‘너 때문이야’를 몰아붙이며 그렇게 자신을 더 할퀴게 하기도 했었다.



안에서 쏟아지는 말을 안으로 억누르며 그녀는 세 가지를 기억하기로 했던 것을 기억 해냈다.




나는, 엄마와 다르다.

나는, 아이와 연결되고 싶다.

나는 상처를 복구하며 살고 싶다.



하지만 밀물처럼 몰려오는 아픈 말들은 여전히 가슴까지 차 올라 있어서 아이에게 어떤 연결의 말을 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잠식하려하는 아픈 말들이 무릎까지 내려가기를 호흡하며 기다렸다. 기다리며 아이의 몸을 주물러 주었다.


작고 말랑한 보드라운 내 아이. 나에게 엄마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쥐어준 소중한 핏덩이. 내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려왔던 아이. 나에게 내 가장 깊은 상처의 지점을 온몸으로 감각하게 해주는, 그래서 아프고도 미워서 서러움을 주는 아이.


“제가 자꾸만 이 아이를 밀쳐냈던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내가 내 안에서 이미 지나갔다고 끝났다고 생각해버리고 싶어서 밀쳐놓은 아픔이 아이를 보면 밀려오니까요. ”


그전까지는 그런 아픈 마음에, 아픔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런 순간의 아이를 보는 것이 힘겨웠다. 하지만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다보니 어쩌면 아이가 그것을 말해주러 나에게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나를 잘 껴안아 가야 한다고, 그래야 내가 정말 내가 될 수 있고, 그럴 때 내가 정말 엄마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그녀는 아이를 잘 안아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번에 다, 가 아니라 조금씩 더.


아이의 몸을 도닥이며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다보니, 어느샌가 뜨거운 말은 쓸려내려가고 정다운 말, 따스한 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옛날 그녀가 듣지 못했던, 하지만 들어야 했던 말이었다.


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내 안에서 밀쳐두고 싶어 했던, 상처받은 여린 마음에 말 거는 일임을. 아이를 안아주는 일이 자기 내면의 아픈 아이, 그렇게 불화살에 화상을 입어 뜨거운 아이를 안아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렇게 마음으로 실감해보기 시작했다.



작은 시작이었다. 아이와 나 사이에서 무심코 끊어지던 마음의 길을 다시 잇는 일, 상처의 불에 데이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을 활용하는 일은


잠든 아이 옆에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아이의 숨소리를 들었다.


손을 더듬어 아이의 가슴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둠 속에선 손이 눈이었다.


손으로 속을 다독이며 결심했다.


‘그 옛날 엄마가 붙여놓은 상처의 불을

촛불의 온기로 바꾸어가는 것을

매일 연습해나갈 것이라고...


 


 



작성 _  글쓰는 상담 심리사 선안남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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