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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윤 Nov 22. 2021

멜론이 먹고 싶다.

전시 《나의 친애하는》을 끝마치고...

1.

 저녁 뉴스에선 10월의 한파소식이 들려왔다. 64년만이란다. 어제만 해도 귓가에 윙윙 거리는 모기를 때려 잡았었는데. 나는 지난 경첩 무렵 장롱 속 봉해놓았던 양털 아우터를 꺼내입었다.

 이전 전시가 끝난 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는 계절이 한달 쯤 일찍 찾아온 듯 공허해보였고, 유독 쌀쌀맞은 전시장의 공기는 정녕 이 곳이 화이트 큐브(제도권 미술관을 뜻하는 용어)임을 실감나게 했다. 이 곳에서 올 가을 첫 입김이 몽글게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큐레이터로 일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그깟 추운 날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난 3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시민 큐레이터 양성 교육>에 선발되어 약 두 달 간 강의를 듣고, 수료와 동시에 전시 기획안을 작성해 제출했다. 이 중 10명을 뽑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직접 전시를 기획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니 미술 이론을 공부하고 있는 내겐 꼭 이뤄내고 싶은 목표였다. 비록 그런 절실함과는 걸맞진 않게 통이 아주 넓은 면바지와 오버사이즈 티셔츠 차림으로 진행한 면접이었지만. 운이 정말로 좋았나보다.

 결과가 발표되고 난 뒤 나는 외갓집이 위치한 경상북도 문경으로 내려갔다. 입하의 청보리가 유록색(柳綠色) 녹음을 이루고 있었다. 막 모내기가 끝난 논밭엔 소금쟁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전시 이야기를 하다말고 갑자기 외갓집 이야기를 한니 글이 산으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물론, 김태리가 이다지도 다정하게 나왔던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를 보고는 나도 시골집으로 내려가 하세월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했다.


2.

 어려운 미술이론 이야기를 구태여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여 전시장을 방문한 친구들에게 설명했던 표현을 그대로 빌려와 본다.

 "한국 근현대의 중심부 역사, 이를 테면 광복과 전쟁, 베트남 파병, 민주화 운동 등과 같은 사건들이 있었잖아. 그런데 우리같은 개인의 이야기는 결코 교과서에는 등장하지 않잖아. 역사의 주변부를 따라 걸어왔다고 해야할까. 전시는 이러한 개인의 이야기 혹은 주변부의 이야기가 중심부 역사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왔는지를 말하고 있어."

 여름이 찾아왔고 나는 한 번 더 외갓집을 찾았다. 봄의 기행이 비교적 힐링에 가까웠다면 이번 방문은 본격적인 전시 준비의 서막이었다. 외갓집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내가 기획한 전시의 주제와 지극히 맞닿아 있었다. 먼저 외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외증조할아버지는 1940년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실종되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중동 건설 붐을 따라 사우디아라비아로 건설 노동을 떠났다. 그리고 엄마의 형제들은 모두 이촌향도하며 지금은 행방이 불명된 큰외삼촌을 포함한 모두가 전국 방방 곡곡 흩어져 살고 있다.

 여름 한 철을 그곳에 머물며 강제 징용 행방불명자 규명 사업에 소명했던 자료와 외할아버지의 1980년 산 단수 여권 그리고 옛 사진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전시장 한 켠을 외갓집의 실제 모습으로 꾸밀 요량으로 마침 맞는 물품들을 골랐다.

 어린 시절엔 자주 들렀던 곳이었는데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거의 내려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로 외갓집의 역사를 기록과 기억으로 재구성하다보니 나는 마치 오랜만에 내려온 고향을 신비롭게 느낀 <무진기행>(1964) 속 주인공 ‘나’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3.

 기획안과 결이 비슷한 작업을 하는 6명의 작가를 선정했다. 우린 죽이 잘 맞았다. 한번의 갈등도 없이 순조롭게 준비가 진행되었다. 열흘 간의 전시 기간 동안 500명이 넘는 관람객들이 방문해주었다. 교수님들도 두 분이나 다녀가시며 축하와 감동의 말씀을 나눠주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는 엄마가 전시장을 찾아 당신이 어린시절 쓰던 물품과 돌아가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사진을 마주하곤 눈가가 촉촉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렸다.

4.

 전시는 끝이 났고 나의 이력서엔 한 줄 자그마한 ‘스펙’이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밥 벌어먹기 어려운 예술을 업으로 삼아 위태로운 일상을 쓸어넘기고 있는 현실엔 변함이 없다. 얼마 전 우리나라 예술인 10명 중 7명의 월평균 수입이 100만 원도 채 되지 않는다는 기사를 접하곤 더 우울해졌다. 대학원에 막 들어왔을 때 학과장님은 그동안 해온 일이나 계속하지, 왜 밥 벌어먹기 힘든 이 세계에 자진 납세하느냐 물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창의력으로 먹고살고 싶다‘라는 문장을 끌어안고 죽고 싶을 만큼 사랑한다. 더군다나 이 일은 일말의 창의력이라도 고갈되어 버리면 등가죽까지 내놓아야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처럼 일약 스타 큐레이터가 된다면야 좋겠지만, 아직은 전시장 벽면을 드릴질 할 때 날리는 분진 들이마시는 순간마저 즐겁다.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라는 말이 현실 직시를 최우선으로 삼는 MZ 세대의 우리에게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잘 안다. 그렇지만 예술 공부를 하면서, 또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솟구쳤던 아드레날린은 대기업과 국가 기관에서 인턴 근무를 하던 시절에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셈비키야(千疋屋)의 멜론‘* 같은 것이었다.



*셈비키야(千疋屋)의 멜론: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은 임종 직전 무엇이 먹고 싶냐 물었던 아내 변동림(卞東琳, 1916~2004)의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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