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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윤 Jan 08. 2022

베를린, 측백나무 숲에 깃든 초여름

 벌써 3년도 더 된 케케 묵은 이야기. 그 시절 일기장을 펼치니 책벌레가 어디론가 기어가고 있다. 그래도 어느 한식의 대가는 3년 된 김치야말로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고 평가했다. 글은 종종 발효 음식-주로 와인일테지만-에 비유되곤 하니, 지금쯤 그 시절을 정돈해 도마 위 상장해본다면 조금 더 깊어진 풍미를 선사할수 있지 않을까.


 2018년 여름의 베를린은 늘 혁오의 신보로 기억된다. 기나긴 이스탄불 생활을 끝마치고 베를린으로 이사한 날은 밴드의 4번째 앨범이 발매되던 날이었고, 나는 <Love ya>가 전하는 사랑의 훈풍과 <Goodbye Seoul>이 희구하는 익숙한 곳에서의 탈피 욕구를 가득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앨범은 내가 잠이 든 것도 잊은 채 반복 재생되었고, 렘 수면의 불규칙한 뇌파가 곡의 가사까지 자연스레 빨아들일 때 즈음 베를린 테겔 공항(Berlin Tegel Airport)에 도착했다.

 베를린을 음차하면 백림(柏林), 측백나무 숲을 뜻한다. 물론 음차어의 뜻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지만 단어가 주는 그 오묘하고 신비로운 감상에 나는 줄곧 베를린을 백림이라 불렀고, 이 글에서도 이제부터 그리 부를테다.

 

  유월의 백림은 이전 해 짧게 들렸던 겨울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그 땐 아침 안개가 자욱해서 안그래도 짧은 낮 시간이 더욱 짧게 느껴졌고, 그마저도 추운 날씨 탓에 거리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유월의 베를린은 태초의 벌거숭이 사람들만큼이나 생명력이 가득했다. 잔디밭에 배를 깔고 누운 청춘들의 권련 연기와 저녁 어스름은 늦은 시간까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젊음을 너무나 아껴 안그래도 짧은 이 시절이 혹여나 일찍 동나 버리진 않을까 아껴 부르곤 한다. 그와 동의어가 되어버린 ‘여름’을 이토록 좋아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백림은 더할 나위없이 자적하기 좋은 곳이었다.


 친구들의 집에 한달 동안 신세를 지게 되었다. 공항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우리는 서로를 얼싸 안아 인사를 나누고는 U5라인의 끝자락, 과거 동백림에 속했던 회노(Hönow)역에 도착했다. 냉전시절 지어진 소비에트식 연립 아파트가 깍뚜기처럼 모여있는 그런 곳이었다.

  이 도시의 인구 절반 이상이 이민자라고 한다. 우리 집은 주 정부의 통계에 걸맞는 훌륭한 표본이었다. 나에게 아무 조건 없이 방 한켠을 내어준 친구 이로나는 어린시절 우크라이나에서 이민을 왔다. 그녀의 부모님과 독일어를 모르는 할머니는 진즉에 독일 국적을 받았는데, 베를린 자유대학(Freie Universität Berlin)에 다니며 노어엔 서툰 그녀는 아직도 너덜너덜한 푸른색 우크라이나 여권을 들고 다닌다. (우크라이나인들이 한국에 방문하려면 관광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이듬해 그녀가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주베를린 한국대사관을 찾던 중 길을 잘못들어 북한 대사관을 찾은 웃픈 일화도 있다.) 옆방을 사용하던 미나는 터키계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를 둔 친구였다. 그러나 터키어는 거의 할줄 몰랐고 스스로를 터키계라고 굳이 인식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우리 집에 사는 유일한 '독일인'은 나를 살뜰하게 챙겨준 게이 친구 파울뿐이었다. 한번은 또 다른 터키계 친구 타르칸 가족의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이슬람의 명절 라마단 축일을 맞아 그의 어머니가 우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돼지고기도 맥주도 잘만 먹고 터키어는 거의 하지 못하는 아들 대신 한국에서 온 친구가 터키어를 한다고 하니 그의 어머니는 무척 흥미를 느끼셨다. 어머니는 음식을 내어주시며 내 옆에 앉고는 연신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셨다. 모처럼 우리는 터키어로 신나게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우리는 짧은 유월의 밤을 한 방에 포개어 누워 공포 영화나 애니메이션 따위를 보며 보냈다. 시내보다 1유로 저렴한 케밥을 안주 삼아 지지리도 맛없는 베를리너 킨들 필스너(Berliner Kindl Pilsener)를 마셔댔다. 가끔 마음이 맞는 밤엔 시내 공원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구경하러 가기도 했다.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를 인상 깊게 본 나로써는 비록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의 향연이었음에도 그 자체로 감상에 젖기 충분했다.


 다 함께 브란덴부르크로 나가 러시아 월드컵 경기를 관람했던 것도 무척이나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국과 독일의 경기가 있던 날, 광장엔 수만명의 인파가 하얀 독일 유니폼을 입고선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대다수가 독일의 압승을 예상했으나 한국이 후반 2골을 몰아넣으며 기적적으로 승리했다. 광장은 이내 충격에 휩싸였다. 독일어를 몰라도 욕임을 직감할 수 있는 고함과 먹다 남은 맥주병이 수류탄처럼 빗발쳤다.

 그 날, 친구들에게 거나한 한국 음식을 대접했다. 경기에서 이긴 덕분이기도 하거니와 한달 동안 신세를 졌음에도 변변찮은 대접 한번 못해 미안했기 때문이다.


 백림의 동네 공원엔 여우가 많았고, 이민자는 정말 많았다. 반려견도 많았고 채식주의자와 LGBT도 많았다. 과거를 반성하는 역사관은 도심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갤러리는 고작 한 블럭에도 여러 군데 있었다.

 글에 담지 못하는 사소한 추억들이 참 많다. 아침마다 조깅을 하며 마셨던 공기내음, 늦은 밤 잔 부딪히는 은밀한 밤의 소리, 길거리를 지날 때 마주쳤던 사람들의 여유로운 미소 그리고 슈프레 강가의 잔물결까지.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결코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은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처럼 명문장가는 아니기에 이 감정들을 여전히 서랍 속에 고히 모아둘 뿐이다.


 언젠가 다시 백림에 가면 스무살 초반 넘치도록 썼던 나의 젊음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머무를 줄만 알았던 나의 시절이 어느덧 이십대의 끝자락에 종착했다. 두려움과 설램으로 올 한해를 살아내어 백림에서 자적하던 나와 백림의 친구들과 그리고 측백나무 숲에 깃든 초여름과 다시금 조우할 날을 꿈꿔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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