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코로나가 터졌다.
여행사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일은 순식간에 멈췄고,
폐업 위기에 놓였다.
그 시기에 나는 체육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수능 공부를 해서 더 좋은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중등 수학도 못하던 내가 수능으로 좋은 대학 가겠다고 자퇴시켜달라고 했으니, 정말 금쪽이 짓이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우리 가족에게 자퇴라는 선택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아버지께서는 딸이 하고 싶은 거라면 어떻게 해서든 해주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당신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하셨다.
요소수를 판매하러 다니시고, 공기청정기를 설치하러 다니시며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다.
그리고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그 돈으로 내 공부를 시작하게 해 주셨다.
현실은 여전히 팍팍했다.
코로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여행 산업이 다시 살아날 것 같지도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하늘 같은 시어머니께 부탁드렸다.
“우리 딸 공부 좀 시킬 수 있게 도와주세요.”
자퇴를 결사 반대하시던 할머니께서도 결국 손을 내밀어 주셨다.
그렇게 나는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수능은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마라톤 선수들도 심박수는 180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에 상응하는 노력뿐이었기 때문이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해야 비로소 개운하게 잠들 수 있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에 13시간씩 공부했다.
졸릴 때는 볼펜으로 다리를 찌르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행복하게 즐기면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혼자만의 쓸쓸한 외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하루 종일 일하시고도 매일 새벽 4시에 나를 위해 일어나셨다.
그리고 몇 킬로도 되지 않는 독서실까지 항상 나를 태워다 주셨다.
딸이 혼자 공부하러 가는 길이 조금이라도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공부하러 다닐 때 춥게 다니지 말라며 패딩을 사주셨다.
정작 아버지께 남아 있던 건 털이 다 빠진 경량 패딩 하나뿐이었으면서.
어머니께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늦은 밤에도 책상에 앉아 계셨다.
딸이 도전하는 여정을 함께해서 힘이 되고 싶다고 하셨다.
내게는 머리가 잘 돌아가려면 잘 먹어야 한다며 삼시 세끼 배부르게 챙겨주셨다.
정작 어머니의 국에는 건더기도 없었으면서.
모의고사 성적이 생각한 것보다 낮게 나와도,
공부를 하다 말고 집에 돌아온 날에도,
단 한 번도 나를 보채지 않으셨다.
단 한순간도 나를 통제하려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숨을 좀 쉬어가며 해도 된다고,
집중 안 되는 날에는 하루 푹 쉬며 재충전하라고,
나를 위로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여러 압박이 있었을 텐데.
나한테 들어간 교육비, 재수를 시켜주기 힘든 상황, 주변의 시선 등등
그럼에도, 부모의 눈높이에서 나를 이끌어 준 게 아니라,
나와 손을 잡고 길을 같이 걸어주셨다.
부모님께서는 환갑이 다 되어 가는 연세에 나를 위해 입시 제도를 처음부터 공부하셨고,
어느새 나만을 위한 입시 컨설턴트가 되어 계셨다.
매일 저녁 나와 함께 체력 시험을 준비해 주시는 운동 파트너였고,
세상에서 가장 엄격하고 진심이었던 면접관이었고,
도전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또 다른 나였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학교에 합격했다.
내가 혼자 이룬 것이 절대 아니다.
그 과정을 함께해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끝까지 할 수 있었다.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은 내가 목표로 향해 올라갈 수 있었던 아주 견고한 계단이었다.
돈 주고도 이런 부모님은 가질 수 없다.
나는, 다이아몬드 수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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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를 퇴교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무조건적인 내 편이 있다.
꼭 성공할 거다. 그리고 많이 돌려드릴 거다.
'받은 것보다 많이'라고는 말 못 하겠다.
내가 어떤 것을 드려도, 내가 받은 것보다 많을 수는 없으니까.
부모님께서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실 때(2년 안으로) 함께 해외여행 갈 거고,
5년 안으로 외풍이 불지 않는 따뜻한 집에서 편안하게 살게 해 드릴 거다.
나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