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봄, 햇살은 유난히 강렬했다. 그 해 동생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봄이 다시 찾아왔을 때 나 또한 시력을 잃었다. 대학병원에서 똑같은 검사를 받았고, 의사는 원인불명의 시신경 위축이라 말했다. 서울의 유명한 병원을 전전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다니던 고등학교도 휴학해야 했다.
아침마다 앞집 아이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도 학교를 가고 싶었다. 오전 내내 누워 있다가 오후가 되면 동생과 함께 약수터에 가 물을 길었다. 돌아오는 길에 비둘기들에게 쌀을 뿌리면, 한 달쯤 지나서부터는 녀석들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날아왔다. 그 작은 기적들이 하루를 버티게 했다.
아버지는 30여 개 포장마차에 술과 음료를 배달하고 빈병을 수거하셨다. 저녁이면 나는 창고로 가 아버지를 도왔다. 술과 음료병이 뒤섞여 있었고, 깨진 병 조각이 손끝을 베곤 했다. 보이지 않는 파편에 다치지 않으려고 목장갑을 두 겹으로 꼈다. 그러나 두 아들의 실명은 결국 부모님이 운영하던 작은 슈퍼마켓을 무너뜨렸고, 집안에는 빚이 산처럼 쌓였다. 새벽마다 빚쟁이들이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공포에 떨며 장롱 속으로 몸을 숨기셨다.
나는 이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여동생과 신문 배달을 하기로 했다. 여동생은 선배의 오토바이에 올라탔고, 나는 자전거로 그 뒤를 쫓았다.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다 역주행을 하던 중 트럭의 경적에 놀라 옆으로 넘어졌다. 다리를 다치고 자전거는 망가져 더는 배달을 할 수 없었다. 결국 학교도 자퇴해야 했다.
자퇴에 필요한 진단서를 받으러 가는 택시 안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장애인학교 졸업식 소식을 들었다. 졸업생의 밝은 목소리가 낯설 만큼 행복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어제와 같은 삶을 더는 살지 않겠다고. 장애인학교에 가야겠다고. 그러나 어머니는 “장애인으로 살아갈 순 없다”며 절망했고, 장애인학교에 가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라고 절규하셨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절규를 뒤로 하고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996년, 장애인학교 고등부 1학년으로 입학했다. 반에는 12명이 있었고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중도실명 학생들이었다. 이론과 실습으로 나뉜 안마 수업은 생경했지만, 나는 손끝으로 배웠다. 같은 반 형들에게 안마를 해주면, 형들은 과자와 컵라면을 내밀며 “잘한다”라고 칭찬해 주었다. 주말이 되면 기숙사에서 돌아와 어머니의 어깨를 눌렀을 때, 어머니는 “몸이 시원하다”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나를 더 안마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숙사에서 동생과 같이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동생을 공부시키려고 내가 먼저 일어나 점자책을 읽고, 동생이 잠들면 다시 점자를 찍었다. 동생을 위해 시작한 습관은 곧 내 삶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꿈도 그 무렵 꾸게 되었다.
1999년, 따뜻한 봄볕을 받으며 대학에 입학했다. 방학마다 안마시술소에서 일했다. 술 취한 손님들의 조롱을 들을수록 오히려 다짐했다. 언젠가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이 나와 같은 절망 속에 갇히지 않게 하리라.
2003년 3월, 학생으로 다녔던 장애인학교에 교사로 첫 출근했다. 후배이자 제자인 시각장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 가슴이 벅찼다. 담임을 맡아 학생들과 ‘꿈너머꿈’이라는 창업동아리를 만들었다. 졸업 후에도 안마시술소에 머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퇴근 후에도 남아 치료안마를 가르쳤고, 방학이면 안마 캠프를 열어 다양한 수기를 익히고, 안마원 원장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도 개최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8명 중 7명이 안마원 원장이 되었다. 학생들은 더 이상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으로 서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들의 성장을 보며, 장애를 수용하고 긍정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오늘도 나는 매일 새로운 나를 만나고 있다. 나의 꿈을 넘어, 이제는 제자들의 꿈을 이루는 길 위에 서 있다. 안마라는 작은 손길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내 삶으로 증명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