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향으로 피어난 하루

에세이

by 이만희

1. 새벽비가 들려준 이야기

새벽 5시 30분, 가을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하루의 시작지 고는 썩 유쾌하지 않은 날씨였다. 비 오는 날이면 늘 그렇듯 작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장애인 콜택시가 제때 올까, 오늘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을까.

그러나 다행히 약속된 시각에 택시가 도착했고, 그 순간의 작은 안도감이 빗속을 나서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거리를 달리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 될 것 같다고.

역에서 만난 근로지원인 선생님과 학생의 얼굴에는 특별한 긴장감이 어려있었다. 오늘은 전국시각장애인바리스타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학생에게는 일 년간 준비해 온 꿈의 무대였고, 나에게는 한 제자의 도전을 지켜보는 소중한 하루였다.

2. 양주로 향하는 길, 마음으로 동행하다

서울역을 거쳐 양주행 지하철로 갈아타는 동안, 편의점 김밥을 나눠 먹으며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보다 더 생생한 것은 오늘 하루가 갖는 의미였다.

한 시간 가까운 이동 끝에 도착한 양주역에서 복지관 차량을 만나 대회장에 들어설 때까지, 학생의 표정에는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고 있었다. 앞치마와 리넨을 두른 채 순서를 기다리는 순간, 나는 교사가 아닌 한 사람의 동행자로서 학생과의 떨림을 함께 느꼈다.

예선 과제인 카푸치노 두 잔은 단순해 보였지만, 그 잔을 완성하기까지 학생이 걸어온 시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중도실명이라는 어둠을 뚫고 새로운 삶의 기술을 익히기까지, 그 시간들이 오늘 이 한 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3. 무대 위에서 피어난 삶의 서사

오후 본선 무대는 더욱 뜨거웠다. 아홉 명의 참가자가 각자의 창작 메뉴를 선보였다. 무화과, 사과, 코코넛, 인절미, 조청... 재료 하나하나에는 각자의 삶의 서사가 담겨 있었다. 어떤 이의 무화과는 고향의 맛이었고, 누군가의 인절미는 어머니의 손맛이었다.

내가 인솔한 학생은 '아침햇살 나이스 라떼'를 준비했다. 메뉴명처럼 맑고 따뜻한 기운이 묻어나는 음료였다. 발표를 마친 뒤 학생의 얼굴에 스친 안도의 표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학생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그 순간 대회장을 가득 채운 것은 단순한 커피 향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자의 삶을 버무려 만든 희망의 향기였다.

4. 3등,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마음

시상식에서 학생의 이름이 불렸다. 3등. 그 순간 학생의 눈동자에 번진 빛을 잊을 수 없다. 마이크 앞에 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중도실명으로 삶의 길을 잃고 방황했지만, 바리스타 과정을 공부하며 다시 희망을 찾았습니다. 오늘 만든 음료를 홀로 계신 아버지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 한마디에 숨이 멎는 듯했다. 아버지를 향한 간절한 마음은 어떤 커피보다 따뜻한 향기를 풍겼다. 그리고 그 향기는 곧 내 기억을 건드렸다. 3년 전 항암 치료 중 떠나신 나의 아버지. 학생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빈자리가 선명히 떠올랐다.

상을 받는 학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오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은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모든 이들이었고, 그들의 꿈을 지켜본 우리 모두였다.

5. 가르치는 자에서 배우는 자로

처음엔 솔직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멀리 양주까지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단순한 '의무'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날 무대 위에 선 제자는 나를 가르쳤다. 교사는 가르치는 존재라고만 믿었던 내가, 그 순간 배우는 자리에 서 있었다.

교육이란 지식을 전해주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끝까지 지켜보며 함께 버티는 일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하루 종일의 피로가 몰려왔지만, 마음만큼은 오히려 따뜻하게 차올랐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어둠 속에서, 나는 오늘 하루가 내게 가져다준 선물을 곱씹었다. 그것은 상장도 상금도 아닌, 한 사람의 성장을 지켜본다는 것의 소중함이었다.

6. 삶의 향기로 완성된 하루

새벽비에 시작한 하루는 결국 한 잔의 커피와 눈물로 완성되었다. 그날 양주에서 맡았던 커피 향은 단순한 음료의 향이 아니었다. 제자가 걸어온 시간, 나의 그리움,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낸 하루가 어우러져 빚어낸 삶의 향기였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친 뒤, 냉장고에서 남은 치킨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스스로에게 주고 싶은 작은 선물이었다.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하루의 여운을 달래주었다.

7. 아들과의 대화

유튜브를 보며 혼자 캔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집에 맥주 있어?"

"응, 있어. 아빠도 한잔 할래?"

나는 좋다고 했다. 아들이 시켜놓은 따뜻한 치킨과 함께 맥주 한 잔을 하며, 아빠가 겪었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었다. 학생의 도전, 3등 입상, 그리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아들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잘했네, 수고했어 아빠."

그 한마디에 오늘 하루가 정말로 완성되었다. 아들의 칭찬은 어떤 상장보다 값졌다. 부자가 마주 앉아 나누는 맥주 한 잔, 그 속에도 삶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오늘은 참 보람된 하루였다. 새벽비로 시작해 아들과의 맥주로 끝나는 하루. 그 사이에서 피어난 것은 커피 향이 아니라, 삶을 향한 진실한 마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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