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교실의 바닥 위로 길게 몸을 눕히던 오후였다. 하루의 분주함이 모두 빠져나가고 학생들의 온기만이 희미하게 남은 빈 교실, 퇴근 전 한 시간의 여유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다. 컴퓨터 자판을 누르는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던 그 적막을 깬 것은 핸드폰 진동이었다. 낯익은 이름.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유난히 친했던, 지금은 경남의 한 특수학교에서 진로상담교사로 일하는 후배였다.
"오빠, 잘 지내나?"
정겹고 담백한 경상도 사투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자 잊고 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며 반가운 마음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이어진 "혹시 지금 시간 되나?"라는 물음 속에는 단순한 안부 이상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목소리의 톤은 때로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후배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근무하는 학교에 L이라는 고3 학생이 있는데, 지적장애가 아닌 저시력만 가진 아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근에 시각장애학교가 없다는 이유로, L은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교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다는 것이었다. L학생의 지난 시간이 마음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후배는 L학생이 고등학교 졸업 후,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전공과정으로 입학할 수 있을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L학생은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어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고 했다. 그 마음이 오죽할까 싶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은 소리와 감촉, 그리고 마음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마음마저 낯섦과 불안으로 가득하다면,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조차 천근만근의 무게로 느껴질 것이다. 통화를 끊고, 나는 마음을 정했다. 내가 L학생에게 가야겠다고. 보이지 않는 L학생의 세상에, 내가 먼저 발을 들여놓아야겠다고.
한 달 후, 기차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 후배가 근무하는 학교에 도착했다. 나를 마주한 L학생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경계심이 옅게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는 빼곡히 준비한 질문지가 놓여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기숙사 생활은 어떤지, 교육과정은 어떠한지, 졸업하면 정말 취업을 할 수 있는지. 더듬더듬, 하지만 단단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쏟아내는 질문들 속에서 나는 L학생이 홀로 보냈을 수많은 밤과, 그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미래에 대한 간절한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아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말투로 정성껏 답해주었다. 딱딱한 정보의 나열이 아닌, 그 아이의 삶 속에 스며들 따스한 풍경을 그려주고 싶었다. 내 이야기가 L학생의 마음에 닿았던 걸까. 아이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직접 와보고 싶다는 용기를 내주었다.
다시 한 달이 지나고, 나는 기차역에서 홀로 세상 밖으로 나온 L학생을 맞이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 구석구석을 함께 걸었다. 앞으로 공부하게 될 교실의 책상을 만져보게 하고, 생활하게 될 기숙사도 보여주었다. 급식실에 맛있는 냄새를 맡게 하고, 체육관의 쩌렁쩌렁한 울림을 듣게 했다. 마침 식사를 못 했다는 아이를 위해 영양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였다. 그날, 아이는 비로소 안심한 듯 환하게 웃으며 입학을 결심했다.
L학생은 약속처럼 우리 학교에 입학했고,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배우고 익혔다. 세상의 피로를 풀어주는 안마사 자격증을, 향기로운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다. 재학 중에는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며 누군가를 가르치는 기쁨도 누렸다. 지금 L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안마사로 취업해, 어려웠던 가정에 큰 힘이 되어주는 듬직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나는 가끔씩 L학생을 떠올린다. 그리고 고민한다. 내 말투가 저 아이의 우주를 넓힐 수도, 혹은 영원히 닫아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말을 '하는' 사람이기보다, 말을 '짓는' 사람이 되려 노력한다. 상담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한 사람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거룩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는 학생에게 나는 온화한 말투로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명령이나 단정이 아닌 존중의 언어는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여는 열쇠가 된다. 내가 상대를 온전히 존중할 때, 상대 또한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아이들을 통해 배웠다.
아이가 서툰 표현으로 질문을 할 때면,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혹여나 내가 잘못 이해했을까 싶어, "네가 지금 궁금한 건 이게 맞을까?" 하고 아이의 언어로 되물어준다. 질문의 의도와 내 이해의 주파수가 정확히 맞춰졌을 때, 비로소 나의 설명은 아이의 마음에 오롯이 가닿을 수 있다. 때로는 설명을 마친 뒤 "내가 설명한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야?"라며 퀴즈를 내기도 한다. 아이가 정답을 맞히면, 미리 준비한 사탕이나 과자를 건넨다. 작은 선물에 아이의 얼굴이 환해지는 순간, 상담 시간은 딱딱한 의무가 아닌 즐거운 놀이가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보내는 일이다. "네 손끝이 정말 야무지구나. 학교에서 안마를 배우면 분명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최고의 안마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럼 돈도 많이 벌 수 있겠지?" 이처럼 구체적인 믿음이 담긴 말은 아이의 잠재력에 불을 붙이는 강력한 에너지가 된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은 아이에게 '너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의 말 한마디는, 세상을 밝히는 등대와도 같다.
칭찬 또한 마찬가지다. 같은 어휘를 반복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습관일 뿐이다. 상담하는 동안 아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그것을 진심을 담아 언어로 표현해주어야 한다. "오늘 이야기 나눠보니 정말 책임감이 강한 학생이구나.", "질문의 깊이를 보니 평소에 생각을 참 많이 하는 것 같아." 이처럼 결이 다른 칭찬은 아이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자존감이라는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한다.
동료들은 가끔 농담처럼 말한다. 입학 상담을 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다고, 모두 입학하게 만드는 비결이 뭐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만 대답한다. 비결 같은 건 없다고. 그저 한 번의 만남일지라도,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그들의 언어로 미래를 이야기하려 노력할 뿐이라고.
말에는 온도가 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따스한 말이 있는가 하면, 여린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차가운 말도 있다. 특히 앞을 보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은 곧 그들이 듣는 말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건네는 따뜻한 말투 하나하나가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되고,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어 나아갈 지팡이가 되어준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