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다.

by 이만희

새벽녘, 스탠드 불빛 하나에 의지해 내 방에 앉아 있을 때면, 창밖의 여명만큼이나 희미하게 지나온 길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저 산만 넘으면', '이 일만 끝내면', '아이만 다 키우면' 하고, 행복에 꼬리표를 달아 저만치 앞서 보낸다.

서울대 입학 통지서를 받고 평생 행복할 줄 알았던 학생들, 대기업에 취업만 되면 행복할 거라고 믿었던 취준생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20대에는 치열하게 스펙을 쌓고, 30대에는 더 넓은 인간관계와 아파트 평수를 향해 달렸다. 그토록 원하던 보직교사 통보를 받던 날,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호했다. 하지만 그 황홀경은 복권 당첨자의 기쁨처럼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익숙한 불안감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성공이라는 이정표를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손에 쥔 것은 분명 있었지만, 마음 한편은 더 공허해지는 기이한 경험. 그것은 아마도 내가 좇던 것이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행복해 보일 조건'이라는 껍데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중턱에서 돌아보니, 내 삶이 가장 빛나던 순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들이었다. 열심히 수업을 마치고 교실 문을 닫는 순간들 까다로운 업무를 마치고 느끼는 순수한 성취감이 아니라, 동료 선생님과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어가던 그 '과정'의 몰입이었다.

우리는 행복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히말라야 정상에만 존재하는 만년설처럼, 아주 특별하고 중대한 성취 뒤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행복은 그런 거대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의 '안녕감'이라는 공기 속에 존재한다.

40대의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 나 자신을 위한 행복은 가장 뒷전으로 미루는 삶을 의미하기도 했다. 가족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명제 아래, 나의 감정은 닳아 없어지는 소모품처럼 취급되곤 했다.

하지만 깨달았다. 행복하지 않은 가장이 어떻게 행복한 가정을 이끌 수 있을까. 메마른 우물에서 어찌 맑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겠는가. 나의 행복 수준이 나의 창의력과 생산성, 심지어 신체적 면역력까지 결정한다는 것은, 곧 나의 안녕감이 나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속한 공동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였다.

행복은 '전염'된다. 내가 먼저 행복해야, 그 긍정적인 에너지가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까지 흘러간다. 내가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조금 더 친절해질 때, 관계는 꽃을 피우고 삶은 더 단단해진다. 이것이 가장으로서, 한 명의 교사로서 이룰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성공'이 아닐까.

우리는 여전히 실패를 두려워하고, 때로 좌절할 것이다. 삶의 무게가 버거운 날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실패가 내 행복의 종착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 무게가 내 삶의 가치를 폄하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행복한지도 모른다. 다만, '더 큰 성공'이라는 안경을 끼고 있기에 눈앞의 행복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볼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한가?'

행복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는 '방식'이어야 한다. 더 이상 행복을 미래로 넘기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삶을 이루는 아주 작은 반짝임을 기꺼이 껴안을 것이다. 삶을 그 어떤 성공보다 찬란하게 밝혀줄 것이라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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