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거실 벽에 붙은 전자시계의 희미한 빛에 의지한 채 소파에 앉아 있을 때가 있다. 창밖은 아직 묽은 먹물처럼 어둡고, 곁에서는 가족들이 고요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다. 이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가장의 무게와 '나는 지금 행복한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동시에 던지는 순간이다.
사십 대 후반,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기보다 성적표처럼 확인하고 싶은 나이다. 더 나은 집, 더 안정적인 노후, 아이들의 밝은 미래. 그것이 행복의 전부라 믿으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마치 행복을 손에 잡히는 트로피처럼 여긴 것이다. "난 행복해질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행복해져야 해"라는 다짐은, 아이러니하게도 늘 '아직 행복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족쇄가 되었다.
우리는 어쩌면 행복을 너무 정면으로, 너무 뜨겁게 마주하려 했는지 모른다. 마치 한여름의 태양을 똑바로 응시하려는 것처럼. 눈이 부시고, 아프고, 결국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행복에 너무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 순간, 행복은 우리를 피해 달아나버렸다.
오랜 시간 나는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은 직접 추구할 때가 아니라, 행복을 이루는 요소들을 추구할 때 비로소 우리 곁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는 태양을 직접 보는 대신, 그 빛이 프리즘을 통과해 만들어내는 '무지개'를 보아야 했다. 행복이라는 거대한 이름 대신, 내 삶을 '완전하게' 만드는 그 다채로운 색깔들을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잠시 지우기로 했다. 대신 내 삶의 '무지개'가 될 다섯 가지 색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색, '마음':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다
가장으로서의 삶은 종종 '의미'보다는 '의무'로 다가온다. 지겨운 출근길, 반복되는 업무, 쌓여가는 청구서. 하지만 행복은 거창한 종교적 깨달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는 일이다.
아침에 내리는 커피의 진한 향에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 학생의 엉뚱한 질문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순간. 나의 일이 단순히 돈을 버는 행위가 아니라, 장애 학생의 자립을 돕기 위해 그들을 취업시키는 일이 천직임을 깨닫는 그 순간에, 마음의 안녕은 조용히 깃들었다.
두 번째 색, '몸': 나를 아끼는 법을 배우다
마흔의 몸은 스무 살의 몸과 다르다. 밤샘은 버겁고, 작은 무리에도 신호를 보낸다. 예전에는 건강을 '결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과정'으로 대한다. 퇴근 후 규칙적으로 가는 헬스장과 저녁 식사 후 삼십 분의 산책. 자극적인 야식 대신 따뜻한 차 한 잔.
몸을 소중히 돌보는 것은, 나와 연결된 이 세계를 애정으로 대하는 첫걸음이었다. 마음과 몸은 분리된 것이 아니어서, 가벼워진 몸은 굳어 있던 마음마저 유연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 색, '배움': 호기심을 잃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이 드물어졌다. '이 나이에 뭘', '먹고살기도 바쁜데'라는 핑계 뒤에 숨었다. 하지만 배움은 학위가 아니었다. 그저 굳어가는 뇌를 단련하는 지적 유희였다.
늘 읽던 분야의 책이 아닌 고전 소설을 펼쳐 들고, 브런치 작가로서 낯선 글쓰기의 세계에 빠져본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하는 일. 그것은 삶이 여전히 흥미진진한 탐험의 대상임을 일깨워주었다.
네 번째 색, '관계': 완벽함이 아닌 연결을 택하다
행복은 관계를 좋게 만든다.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관계는 행복의 가장 민감한 지표다. 예전의 나는 갈등을 '실패'로 여겼다. 행복한 가정은 늘 화목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갈등도 인간답게 사는 삶의 일부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불화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불화가 생겼을 때 그것을 함께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다. 퇴근 후 스마트폰 대신 아이의 하루를 묻고, 아내의 지친 표정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 완벽한 아빠, 완벽한 남편이 되려 하기보다, 그저 연결되어 있으려 노력하는 것. 그 안에 진정한 안녕이 있었다.
다섯 번째 색, '감정': 모든 감정을 끌어안다
행복을 직접 쫓을 때, 우리는 기쁨, 즐거움 같은 '좋은' 감정만을 편애하게 된다. 그리고 불안, 슬픔, 분노 같은 '나쁜' 감정은 억누르거나 외면한다. 하지만 '완전한 사람'의 안녕은 그 모든 감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가장으로서 느끼는 중압감, 때때로의 무력감, 심지어 머리카락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의 짜증까지도. 그 모든 것이 '나'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감정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될 수 있었다.
행복은 좇아가서 잡는 목표가 아니었다. 행복은 내가 하루하루 정성껏 채워나간 그 '무지개색'들이 모여 자연스레 발하는 '빛'이었다.
오늘 저녁, 나는 다시 거실 소파에 앉는다. 여전히 어깨는 무겁고, 삶의 질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행복한가'라고 묻는 대신, '오늘 나의 무지개는 어떤 색으로 채워졌는가'라고 묻는다.
의미를 되새겼고, 조금 걸었으며, 새로운 기사를 읽었고, 가족과 웃었으며, 피곤함까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행복은 저만치 달아나는 신기루가 아니라, 지금 내 발밑에서 단단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