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작은 것부터 느낀다.

by 이만희

40대 중반의 교사. 누군가에게는 존경의 이름일지 몰라도, 내게는 때로 '반복적인 삶'의 동의어였다. 특히 모든 것이 멈춰 섰던 2020년 팬데믹의 시간을 기억한다. 텅 빈 교실, 모니터 너머로만 존재하던 아이들의 얼굴. 우리는 모두 지극히 되풀이되는 일상에 갇혔다. 커피 메이커를 켜고, 다자간통화를 시도하고, 빈 교실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끝없는 궤도 속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우리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면 작은 것부터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그 '이유'라는 것이 거대 담론처럼 느껴져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삶의 의미, 자아실현 같은 단어들은 켜켜이 쌓인 분필 가루처럼 공허하게 흩날렸다.

그러다 문득, 내 글 속의 다른 문장을 떠올렸다. 업무를 '천직으로 바꾸어 보았다.

나의 업무는 간단했다.

아침 7시 50분까지 출근한다. 45분 단위로 수업을 하고, 10분간 쉰다.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고, 때로는 꾸짖는다. 끝없는 행정 업무와 보고서를 처리한다. 퇴근한다.

지독히도 건조하고, 어떤 의미도 찾기 힘든 목록이었다. 이것이 정녕 내가 20여 년을 바친 삶의 전부일까. 가슴이 막막해졌다.

내 글에서 말한 대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과정이 내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돕는가?"

그렇게 다시 써 내려간 나의 '천직'은 이러했다.

나는 매일 아침, 누군가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펼쳐지는 작은 우주로 들어선다. 나는 세금을 내는 사회구성원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안마를 가르친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눈빛 속에 숨어 있는 '왜?'라는 질문을 길어 올리기 위해서다. 나의 꾸지람은 포기가 아닌 관심의 다른 이름이며, 행정 업무는 아이들이 더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항해할 수 있도록 돕는 보이지 않는 돛을 다는 일이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소중히 여기는 '성장'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며, 학생이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한 내면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나도록 도울 것이다.

글을 써 내려가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내 '작업'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수업은 45분 단위로 돌아가고, 행정 업무는 버겁다. 하지만 그것을 감당하는 내 마음의 무늬가 달라졌다.

니체는 말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자는 거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라고. 내게 '이유'는 '아이들의 성장'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업이 끝난 후, 쭈뼛거리며 다가와 "선생님, 그 이야기 조금 더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한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모니터 너머로도 전해지던 작은 열기였다.

그 '이유'를 발견하자, 반복되던 '어떻게(how)'라는 더 이상 나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되었다. '반복적인 삶'은 '의미 있는 의식'으로 변모했다.

삶의 의미는 히말라야 정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 나의 교실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 속에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이라는 원고를 매일 써 내려가는 작가다. 혹시 지금 당신의 삶이 무의미한 반복처럼 느껴진다면, 잠시 멈추어 당신의 '작업 설명서'를 '천직 설명서'로 다시 써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이 하는 그 일의 진정한 가치, 그 사소한 행동 속에 담긴 '이유'를 발견하는 순간, 지루했던 일상의 모든 풍경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기어이 행복을 찾아내고야 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전 03화행복은 내 발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