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세상은 시각이 아닌, 소리와 감촉, 그리고 쉼 없이 흘러가는 생각의 윤곽으로 그려진다. 내게 주어진 이 '어둠'이라는 캔버스는 때로 너무나 거대하게 느껴진다.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쉴 새 없이 이 덩굴에서 저 덩굴로 뛰어다니는 마음을 '원숭이 마음'이라 부른다. 내 안의 원숭이는 칠흑 같은 캔버스 위에서 유독 더 기승을 부렸다. 보이지 않는 내일을 향한 걱정과 이미 만질 수 없는 어제를 향한 후회 사이를 광대처럼 오갔다.
과거에 살면 우울함에 빠질 수 있고 미래에 살면 불안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어두운 순간은 대부분 현재에 머무르지 못해 생기는 것이라는 말이, 나의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볼 수 없는 나는 어떻게 '현재'에 머물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여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대신,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명상 책 속의 '호흡'과 '신체의 감각'이라는 구절에 더 깊이 매달렸다.
명상이란 티베트어로 '곰', 즉 '익숙해지는 과정'을 뜻한다고 했다. 나는 명상을 통해 대단한 깨달음이나 시각적 평온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나의 '현재'와 익숙해지려 애썼을 뿐이었다.
나의 '현재'는 거창한 곳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등의 단단한 감각, 그리고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내 '배' 위에 있었다.
다시 집중한다. 마음 챙김의 핵심은 완벽한 집중이 아니라, 흐트러졌을 때 '다시 돌아가는 태도'라고 했다. 내 마음이 또다시 미래의 불안이나 과거의 후회라는 어둠 속으로 달아날 때, 나는 그저 알아차렸다. 그리고 질책 없이, 살며시 마음을 다시 '배 호흡'으로 데려왔다. 솟아오르고, 꺼지는. 이 단순하고도 명백한 '지금'의 증거로.
"좋은 명상도 나쁜 명상도 없다"라는 말은 내게 해방과도 같았다. 눈에 보이는 성과나 '잘했다'라는 평가에 익숙했던 내게, 명상은 '그저 있음'을, 판단 없이 경험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기분이 좋아지든 나빠지든, 그저 "매일 치아 위생을 챙기듯 뇌 위생을 챙기는" 심정으로 매일 5분, 나는 나의 어둠과 그 안의 호흡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원숭이 마음'과 씨름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내게는 '시각의 부재'가, 누군가에게는 '과도한 업무'나 '복잡한 관계'가 그 원숭이가 날뛰는 무대일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열리는 곳은 오직 '현재'뿐이라는 것을.
과거의 유령과 미래의 신기루를 좇느라, 지금 발끝에 와 닿는 땅의 감촉과 폐를 채우는 공기의 고마움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는 다른 할 일도, 갈 곳도 없다. 그저 이 호흡과 함께 현재에 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이 세계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닻이 '호흡'이었듯, 우리의 요동치는 삶에도 가장 든든한 닻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