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0대 중반의 시각장애 학생과 함께 수업하고 있다. 내 말소리와 빗소리, 그리고 학생이 점자를 찍는 소리가 교실을 채운다. 우리는 종종 '현재'라는 단어에 '선물(present)'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하지만 내 앞에 앉은 이 학생에게 '지금, 이 순간'은 선물이기에 앞서,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점의 한 점 한 점을 맞이해야 하는 치열한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그에게서 삶을 배운다.
우리는 모두 스트레스를 안고 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끝없이 밀려오는 담임 업무, 수업에 대한 긴장감, 이런 것들이 내 어깨를 짓누를 때면, 나는 종종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그저 고뇌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듯 웅크린 근육질의 존재. 로댕은 말했다. 그는 "팔과 등과 다리와 꽉 쥔 주먹과 힘을 준 발가락의 모든 근육으로 생각하고 있다"라고.
내 학생이 바로 그렇다.
그에게 세상은 예측 불가능한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얼마 전, 그는 흰 지팡이로 길을 걷다가 갑자기 울린 자동차 경적에 온몸이 경직되는 경험을 했다. 그에게 그 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거대한 위협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스트레스에 대한 나의 통념이 얼마나 얄팍했는지 깨닫는다. 우리는 흔히 스트레스를 없애야 할 '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스트레스 그 자체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회복의 부재'였다.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덤벨을 들 때 근육은 미세하게 찢어진다. 이 상처가 '회복'될 때 근육은 더 강해진다. 스트레스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안티프래질'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스위치다. 삶의 문제에서 회복되는 시간만큼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그는 누구보다 회복력이 강했다. 그는 경적에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내가 가르쳐 준 호흡법을 실천했다. 그는 이 시간을 "더 건강한 삶을 위한 단 하나의 조언"이라며 소중히 여긴다. 1분 남짓,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길게 내쉬는 그 순간. 그것은 그가 자신에게 주는 가장 절박하고도 소중한 '미시적 회복'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2시간 일하고 10분 쉬는 것조차 사치라 여긴다. 스마트폰을 보며 쉬는 시간을 또 다른 '일'로 채운다. 오롯이 하나에만 집중하는 그 순간을 잃어버렸다. 회복할 틈 없이 자신을 몰아붙인 결과, 우리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내면의 근육은 회복할 기회 없이 손상되어 간다.
때로는 기쁨이 미소의 원천이 되지만, 미소가 기쁨의 원천이 되지는 않는다. 그 중도 실명한 학생은 교실에서 볼 때마다 자주 웃는다. 그 미소는 역경을 이겨낸 자의 단단함이고, 매 순간 의식적으로 '회복'을 선택하는 자의 여유다. 그는 자기 삶을 통해, 스트레스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잘 겪어내는 것'임을, 그리고 그 핵심은 '잘 쉬는 것'임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그는 멈춰 있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스트레스라는 압력을 받아 웅크렸다가도, 이내 자신만의 호흡과 리듬으로 다시 튀어 오를 준비를 하는 '살아있는 용수철'이다.
오늘 하루, 어떤 스트레스가 우리를 짓눌렀는가. 괜찮다. 다만, 자신에게 1분의 '멈춤'이라도 선물해 주기를. 90분마다 일을 멈추고, 잠시 창밖을 보며 깊은 호흡을 세 번만 해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