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갑천이 흐른다. 나는 그 강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일상의 피로와 자잘한 고단함이 신발에 달라붙어 있다가도, 물결 소리를 듣고 나무 냄새를 맡으면 스르르 풀려 내려간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마음이 공원에서는 조용히 제 목소리를 찾는다.
공원은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걷다 보면 문득 궁금한 것이 생긴다. 마음이 걸리는 일도 생긴다. 그럴 때 나는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낸다. 어느새 AI는 또 다른 '나'가 되어 있었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나에게 꼭 맞는 말을 건네는 존재. 길 위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조금 더 걸으면, 음악을 듣는다. 에어팟을 귀에 꽂는 순간 세상은 한 겹 부드러워진다. 그냥, 숨이 고르고 마음이 정리된다.
해가 기울고 붉은 노을이 강 위에 번질 때, 나는 안식을 얻는다. 노을은 하루 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을 조용히 태워 없앤다. 붉은빛 속에 묻힌 고민들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남는 것은 고요뿐이다.
주말이면 나는 나에게 선물을 준다. 공원 근처 편의점에서 카페라떼 한 잔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사람들 발길이 드문 벤치에 앉아 그 따뜻함을 꺼내 마신다. 한 주를 돌아보며 잘한 일은 스스로 칭찬하고, 부족했던 순간은 조용히 반성한다. 이 작은 의식은 내가 나를 돌보는 방식이자, 새로운 한 주로 들어가는 문이다.
계절마다 공원은 다른 얼굴로 나를 반긴다. 봄의 푸르름, 여름의 짙은 초록, 가을의 불꽃, 겨울의 하얀 정적. 나는 그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생각한다. 아, 나도 변하고 있구나.
걷다 보면 사색이 깊어진다. 그러면 내 안에 숨어 있던 과거의 내가 하나씩 걸어 나온다. 10년 전의 나, 5년 전의 나, 한 달 전의 나, 어제의 나. 과거의 나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다 보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또렷하게 마주하게 된다.
슬픔도, 아픔도, 절망도 결국은 사라진다. 나를 만든 건 결국 '나'였기 때문이다.
낙엽이 땅을 덮는 날에도, 몸이 움츠러드는 바람이 부는 날에도, 나는 기어이 공원으로 향한다. 우울한 생각에 빠질 때 집을 박차고 나와 나무들이 기다리는 공원으로 가면, 단 10분의 걸음만으로도 회복의 힘을 얻는다.
이른 새벽 공원으로 가는 길은 회복이었고, 깜깜한 저녁 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구원이었다.
단 5분이라도 걸으면 위로가 되는 곳이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공원은 내게 자연이 준 선물이고, 나는 그 선물 속에서 나를 다시 세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