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오늘을 살아간다

by 이만희

절망은 언제나 조용히 찾아온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예고도 없이. 학교에서 내가 맡을 일이 사라진 날,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절망은 슬며시 자리를 잡는다.

그럴 때 나는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절망을 피해 돌아가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선다. 그 순간만큼은 나를 변명 없이 바라본다.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누군가 일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인가.

삶이 버겁다고 해서 세상이 먼저 바뀌지는 않는다. 대신 나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일이 많아서 힘든 날보다 마음이 흐트러진 날이 더 버거웠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절망의 순간일수록 사소한 약속을 더 지킨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자리에서 책을 펼친다. 몸을 움직이고, 숨을 고르고, 한 문장이라도 적어 내려간다. 성실함은 위대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을 대하는 자세라는 것을 그제야 조금 알게 된다.

삶이 나를 벼랑 끝에 세운 것 같을 때, 나는 빅터 프랭클의 문장을 떠올린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인간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자유는 태도였다고 그는 말했다. 환경은 빼앗길 수 있어도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고.

그 문장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절망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붙잡은 삶의 방식이다.

후회는 언제나 현재를 비워버린다. '그때 그랬더라면'이라는 말은 지금의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만일'을 말하지 않으려 애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앞당겨 불안해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가능한 일에 집중한다.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걷고, 읽고, 쓴다. 과거에 머물러 스스로를 소모할 것인지, 현재에 집중해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지는 결국 나의 선택이다. 태도의 문제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뿐이다. 나는 불안을 밀어내지 않는다. 저항할수록 더 크게 흔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불안을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받아들인다.

불안은 나의 존재를 들여다보게 하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요가 필요하다. 고요하지 않으면 마음은 쉽게 흔들린다. 그래서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중요하다. 루틴은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가장 현실적인 장치다.

교사로 살아오며 나는 언어의 힘을 자주 확인했다. 하나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생각의 방향을 만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정한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경험은 언어로 정리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언어가 확장될수록 사고의 문도 함께 열린다. 내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내가 말할 수 있는 만큼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절망의 순간에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거창한 희망이 아니었다. 오늘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 주는 언어였다.

중년의 교사로 살아가며 나는 조금씩 배워간다. 삶은 한 번에 이해되지 않고 의미는 기다린다고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태도가 내일의 삶을 만든다. 지금에 집중하는 말, 흔들리지 않는 언어, 고요한 중심을 지키는 반복.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면, 나는 다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

삶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태도로 증명된다. 내가 선택한 언어와 자세로 오늘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가장 현실적인 희망이다.

이전 20화삶은 언어로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