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요망한 애순이와 나의 소심한 혁명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었다.
미술학원을 다닌 적도 없고
누가 가르쳐 준 건 아니었지만,
종이에 뭔가를 그리는 건 늘 즐거운 일이었다.
교내 미술대회가 있다는 말이 나오면,
나는 항상 손을 들었다.
수업 시간에 교내 방송으로 이름이 불리고
조용한 교실문을 드르륵 열고 빠져나가는 순간,
그 짧은 자랑 같은 기분이 좋았고, 멋졌다.
초등학교 4학년. 그때는 학기 초마다 환경미화를 하고,
부모님들을 초대해 반을 보여주는 행사가 있었다.
그날도 나는 미술시간에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시더니,
"잘 그렸다"며 한 장 더 그려달라고 하셨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기꺼이 한 장을 더 그렸다.
그런데 다음 날, 교실 칠판 위
‘우리 반 자랑’ 코너에 걸린 그림,
심지어 더 잘 그린 그림이,
반장 이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저건 제 그림인데요…” 하고 선생님께 조심스레 말했고,
선생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반장이 그림을 못 그렸잖아. 넌 잘 그리니까 하나 주자.”
어린 마음에도 무언가 불합리하다고 느꼈지만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나마,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느꼈던 것 같다.
다음 날, 환경미화 날.
엄마도 오셨고, 다른 학부모들도 반을 둘러보던 그때—
나는 엄마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거 내가 그린 건데,
선생님이 반장 이름 써서 걸어 주셨어!”
조용하던 교실에 울려 퍼진 나의 목소리.
소심한 아이의, 소심하지 않은 혁명.
엄마는 웃었고,
선생님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고,
나는 마음 한켠이 시원했다.
얼마 전,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보다가
부급장 ‘애순이’를 보는 순간
그날이 떠올랐다.
아무도 안 봐줄 것 같았던 나의 마음.
그걸 꾹꾹 눌러 담았던 어린 날의 자존심.
그때의 나는,
어설픈 지금의 어른보다 더 멋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