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창문 앞에 서면 광교산이 보인다. 여러 종류의 나무 중에서 키 큰 적송 세 그루가 유독 눈에 잘 띈다. 잘생긴 탓도 있지만, 아파트에서 아주 가까이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파트는 광교산 자락에 세워졌다. 단지 제일 위쪽에 있는 우리 집은 어쩌면 예전에는 깊은 산속이었는지 모른다.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부는 날이면 활엽수들은 온몸으로 광란의 춤을 춘다. 그러나 세 그루의 소나무는 덩실덩실 어깨춤만 출 뿐이다. 그 모습이 아주 점잖아서 나는 양반 나무라고 부른다.
11월에 첫눈이 내렸다. 얼마 전까지 단풍이 물들고 있었고 산책길에 땀을 닦아야 했는데 갑자기 추워지더니 펑펑 눈이 내렸다. 110년 만에 오는 폭설이다. 지붕 위에도 도로에도 나무에도 눈이 수북수북 쌓였다.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는 휴교를 발표하여 손녀와 손자가 학교에 가지 않았고, 딸과 사위도 재택근무라고 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바깥은 눈보라가 치고 있지만, 집 안에서 베란다 창을 통해 보는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눈을 보며 그 풍경을 즐겼다. 얼마 전에 읽은 한강의 작품 『흰』에서 나온 문장 하나를 생각하면서.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다음날 그 나무를 보았다. 소나무 세 그루 중 하나가 거의 90도 허리가 휘어져 있는 것이다. 마치 짐을 허리에 잔뜩 지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꼬부랑할머니 같았다. 한쪽에 유난히 잎이 많았는지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왼쪽으로 흰 것이다. 저러다가 꺾이면 어쩌나 염려가 되었다. 며칠 지나 눈은 녹았지만 휘어진 가지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아침마다 소나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가슴 졸이며 창문을 연다. 조금씩이라도 일어서기를 기대하며.
이번에 온 눈은 물을 많이 머금은 습설이라고 한다. 그래서 눈 무게가 무거워 비닐하우스 지붕이 내려앉고, 재래시장 지붕도 내려앉아 피해가 무척 컸다. 산에 나무도 피해를 많이 입었다고 한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러지거나 쓰러지거나 뿌리가 뽑히기도 했다.
올 3월에는 기후 위기로 허약해진 금강소나무 수백 그루가 폭설에 뿌리째 뽑히는 일이 있었다. 울진군 금강송면 일대에 약 40cm 폭설이 내린 뒤 금강소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졌다는 것이다. 습설이 원인이긴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기후 스트레스를 받은 나무들이 허약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뜨거워진 지구에서 여름철 폭염에 노출돼 나무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는 식물의 광합성마저 방해한다고 한다. 그래서 기후 위기가 숲까지 파괴한다는 것이다.
기후 때문에 내가 키우는 화초까지 피해가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화분이 많이 있다. 나이가 많은 소철이나 관음죽 같은 것은 큰 화분에 심어져 있지만 대체로 작은 화분들이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바이올렛 종류이다. 잎을 잘라 뿌리를 내리면 잘 살기 때문에 화분이 많아진 것이다. 그래서 덕분에 여러 화분에서 일 년 내내 바이올렛 꽃을 보게 된다. 오랫동안 잘 키워 왔는데 이번 여름에 꽃을 많이 죽였다. 추위에 약한 것을 알기에 나는 겨울이 되면 바이올렛 화분을 실내에 옮기는 작업부터 한다. 100개가 넘는 화분을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꽃을 추위에서 보호할 수 있고, 겨울에 실내에서 꽃을 보는 즐거움도 크기 때문이다. 더위에 그렇게 약한지는 몰랐다. 이번 여름 불볕더위가 바이올렛에게 참으로 잔인했다.
기후 위기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게 한다. 11월에 온 첫눈인데 우리 동네에 47cm 눈이 내렸다. 오랫동안 잘 살던 꽃이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기후 스트레스를 받아 숲의 나무들이 약해졌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보게 될까.
폭설이 내린 지 3주가 되었다. 다행히 소나무는 죽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허리를 세워 지금은 40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매일 쓰러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얼마나 지나면 다시 똑바로 서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어려움을 견디고 다시 바로 선 그 나무가 더욱 강하고 튼튼한 나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눈에는 마치 고난을 받은 후 순금처럼 되어 나온 욥 같이 보인다.
-태사문학 제 4집 2025 《구슬비》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