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이가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 표정은 비장하다. 삶과 죽음, 그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본인의 의지일 때도 있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손에 맡겨지기도 한다.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그는 생각한다. 기적과 같이 살아남은 생명의 작은 불씨마저 영영 소멸되어 버릴까? 아니면 그 나무가 꽃을 다시 피우게 될까? 참으로 중요한 갈림길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의 이름은 박비(婢). 신분이 노비인 것도 서러운데 왜 이름까지 비라고 지었을까. 그는 늘 궁금했으나 박씨 성을 가진 종이라는 이름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청년이 된 비 앞에 높은 신분의 한 양반이 찾아와서 자신이 이모부라고 했다. 그리고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출생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 그가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 일어났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역사에 대해서였다. 그는 종이 아니라 역적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태중에 있을 때 이미 남자로 태어나면 죽이라는 어명이 내려진 운명이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아기를 살려낸 사람은 지금의 어머니다. 노비였던 그녀는 주인의 아들을 자신이 낳은 딸과 바꿔치기 함으로써 아기의 생명을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조선 5백년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살육의 현장, 삼족을 멸하고 남자의 씨는 말려버리겠다는 세조의 의도대로 사육신의 남자혈육은 다 죽고 말았다. 그런데 그 위기의 순간에 생명 하나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경상도 땅, 달성군 묘리에서 17년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취금헌 박팽년 선생의 손자 박비의 이야기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박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모부는 자수를 권했다.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 본래의 신분을 되찾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서슬 퍼렇던 세조는 이미 죽어 임금도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임금도 세조의 손자인데 자수한다는 것이 목숨을 건 도박이 아니겠는가,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이다.
박비가 자수를 결심하고 한양에 가는 날 그는 문낵이고개(聞樂峙)를 넘어갔다. 묘리에서 왜관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안부를 묻고 듣는다는 뜻에서 문낵이라 한다. 문낵이 고개에 서면 낙동강이 보인다. 언덕을 내려가 낙동강을 따라 걷다보면 한양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는 고개에 서서 두렵고 떨리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저 아래에서 유유히, 그러나 무심한 듯 흐르는 낙동강을 내려다보았다. 수천수만 년 전부터 흐르고 있는 강은 앞으로도 계속 흐를 것이다. 한치 앞을 알 수 없고 마치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인간의 존재에 비해 자연은 얼마나 유장한가.
그의 할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면 이야기를 듣기만 했는데도 모골이 송연했다. 끔찍한 고문을 받고 옥에서 죽었는데 또 거열형까지 당했다고 했다. 자신의 할아버지뿐 아니라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형제분들, 자신의 아버지, 아버지의 형제까지 그렇게 남자들은 다 죽고, 재산은 몰수되고, 집안의 여자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했다. 그는 자수할 결심을 하고 발걸음을 내디뎠으나 두려웠다. 어쩌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되어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을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박비가 마을을 향해 언덕을 내려오고 있다. 한양을 향해 고개를 넘을 때 발걸음은 무겁고 표정은 비장했지만 지금 발걸음은 날 듯이 가볍고 얼굴은 기쁨으로 환하다. 새로 태어난 듯하다. 그가 한양에서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세조의 손자 성종은 세조와는 다른 임금님이었다. 감히 임금의 명을 어기고 속이기까지 한 박비와 그의 어미를 죽이지 않고 용서했다. 또 한 번의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는데 임금은 그에게 새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사육신 중 유일하게 남은 옥구슬이라는 뜻의 일산(壹珊)이란 이름을 주셨다.
사육신 여섯 가문 가운데 유일하게 대를 이은 박일산은 묘골에 터를 잡아 그의 자손들이 수백 년 이어져 내려오고, 묘골 순천 박씨의 입향시조가 되었다. 그 후 그의 자손들은 할아버지의 봉제사만이 아니라 멸문지화로 절손된 사육신 다섯 분의 봉제사까지 받들어 오늘에 이르렀다. 박비가 내디딘 발걸음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했지만 그가 용기를 내어 한 역사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묘골마을을 찾아갔다. 내가 묘골을 방문한 날은 폭염이 계속되던 한여름이었다. 꽃이 활짝 핀 배롱나무가 마을입구에서부터 사육신기념관까지 가로수로 길게 이어져있었다. 배롱나무는 나무줄기가 매끄럽지만 속이 꽉 차 있어 일편단심을 나타낸다하여 예전부터 사당이나 서원 등에 많이 심었고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온 나무이다. 한여름, 산과 들이 초록으로 덮일 때 배롱나무의 붉은 꽃은 초록과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묘골을 방문했을 때보다 마을은 더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고 고택들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마을 곳곳에는 사육신을 기념하는 건축물들이 국가 보물로, 문화재로 남아있다. 마을 입구에는 충절문이 서 있고, 마을 주민은 절개와 의리라는 뜻의 절의(節義)라는 단어, 우리가 거의 잊고 사는 이 단어를 일상어로 쓰고 있다.
사육신의 정신, 불의한 권력에는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그 정신은 500년 동안 우리 민족 속에 면면히 내려와 어쩌면 지금의 민주화를 이룬 정신적 뿌리일 수도 있다. 지금 묘골이 충절의 고장으로 이름이 나 대구 근교의 명소로 충분히 자리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박비가 자수를 결심하고 넘어갔다는 문낵이고개에 올라갔다. 그리고 고개에 세워져있는 육각정에 올라가 저 아래 흐르는 낙동강을 내려다보았다. 어려서 들었던 박비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내 외할머니가 묘골 순천 박씨이고 어머니는 외가인 묘골에서 태어나 5살까지 묘골에서 컸기에 나는 외할머니와 어머니한테 묘골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주로 박비와 박비를 살려주고 키워주셨던 어머니, 여종에 대해서였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참 의리가 있었어.”
지금도 귀에 맴도는 외할머니의 음성이다. 이미 주인의 가문은 몰락했고 그녀는 자신과 똑같이 노비가 된 마님에 대해 어떤 의무도 없었는데도 그렇게 했기에 세종대왕과 단종에게 의리를 지킨 사육신만큼 그 여종을 칭송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는 참으로 긴장감이 넘치고 아슬아슬했지만 박비의 용기가 얻어낸 신분 복원의 역전의 내용이라 재미있었다.
나는 박비를 살린 여종, 그 할머니를 참배하고 싶어졌다. 뿌리를 찾아가 보면 나의 존재 역시 그 할머니와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기의 생명의 은인이며 후손들에게도 자신의 생명이 있게 한 존재인 그 여종을 기념하는 추모비 같은 것이 어디에도 없었다. 이럴 수는 없는데 왜 그럴까? 그 이야기가 단지 야사나 안방에서 전해지던 여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에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인데…. 기념비 같은 것이 없어도 마음으로 기억하고 추모하면 충분해서 그런 것일까.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던 태胎중의 아기를 살게 하고 삶이 이어지게 함으로써 그 마을을 존재하게 한 주인공에 대한 예의는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태중의 아기가 남아인지 여아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기의 생명을 걸었고 그런 위험을 감수했던 분이 아닌가. 양반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종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다. 태를 지키고 아기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모든 어미들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까지 극복했던 분이었다.
박일산은 친어머니를 만나서 같이 살게 되었을 것 같은데 키워준 어머니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그녀의 신분이 노비에서 면천(免賤)되어 그녀는 친딸을 찾아 마을을 떠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어떤 기념물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묘골에 사는 후손들이 자신들이 받드는 조상과 똑같이 그녀를 받들고 기념한다면 묘골은 훨씬 더 빛날 것이다. 돌아오는 내내 외할머니가 이야기했던 ‘의리’라는 단어가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