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토벌대가 와서 빨갱이랍시고 사람을 죽이고, 밤에는 폭도들이 와서 반동이라면서 죽이고….”
제주에서 잠시 살 때 마을 할머니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할머니들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해안 마을이었기에 중산간 마을에 비해서 피해가 크지 않았는데도 그 기억은 무척 아픈 것이었나 보다. 제주 사람이라면 직계가족은 아니라 해도 4·3 사건으로 인해 친척들의 희생까지 따지면 어느 누구도 비켜갈 수가 없을 것이다.
이번 제주 여행은 제주에서 30여 년 살다 은퇴하여 제주를 떠나는 심 교수가 안내를 맡았다. 첫날은 ‘생각하는 정원’, ‘탐나라 공화국’을, 둘째 날에는 서귀포에 있는 미술관들을, 셋째 날엔 ‘4·3 평화공원’을 갔다. 제주는 40여 년 전 처음으로 신혼여행을 갔었고 그 후에도 수차례 여행했으며 잠시 살기까지 했지만 4·3 평화공원은 처음이었다. 2003년에 평화공원 기공식이 있었고, 2008년에 평화기념관이 개관되었는데 많이 늦었다.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공원은 넓은 장소에 잘 조성되어 있으며, 기념관은 자료가 많아 4·3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가장 가슴 아픈 곳은 위패 봉안실이었다. 넓은 한 벽면을 가득 채운 1만 4,117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그렇게 많은 위패를 본 것도 처음이라 가슴이 꽉 막혔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딸이고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약 85%는 토벌대에 의해 15%는 무장대에 의해 희생됐다고 한다.
평화기념관 안에서 4·3의 의인 김익렬 연대장에 대한 자료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사건이 나던 해에 제주에 주둔했던 9연대 연대장이었던 분이다. 그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중장으로 예편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된 분이다. 그는 죽기 전에 <4·3의 진실>이라는 실록 유고를 남겼다. 어쩌면 진실에 가장 가까운 기록일 것이다.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무장대 대장이었던 김달삼과 담판,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었고, 또 회담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평화회담대로만 순조로이 진행됐더라면 공권력에 의한 초토화 작전은 없었을 것이고, 제주에 그렇게 많은 희생자는 없었을 것이다. 무고한 양민이 아무 죄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너무 많이 학살되었다. 그 점이 정말 안타깝다. 그의 화평정책은 미 군정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고, 이로 이해 9연대장의 자리에서 해임되는 불운을 겪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오라리 방화 사건을 일으켜 평화회담을 방해한 세력은 역사의 죄인이 틀림없다.
집으로 돌아와 김익렬 장군의 실록 유고 <4·3의 진실>을 찾아보았다. A4용지 46쪽 분량이다. 사건 당시 제주 상황과 사건 경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분명히 4·3 사건은 남로당의 선동으로 폭동이 일어났으며 처음 폭도의 수는 300여 명이라고 적고 있다. 또 폭도들의 만행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원한에 찬 대중이 무기를 손에 잡으면 상상할 수 없는 만용과 잔인성을 발휘하게 된다. 제주도 폭도들이 바로 그랬다. 기세가 충천하게 되자 예의 만행과 잔인성이 나타났다. 경찰에 협조한 자에 대한 처형은 특히 잔인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락 입구나 마을 한복판에서 나무에 결박한 후 부락민들을 집합시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폭사시키는 만행도 벌어졌다.”
그는 폭동의 원인으로 제주도에 이주하여온 서북청년단들이 도민들에게 자행한 빈번한 불법행위(고문치사 강간 등)가 도민의 감정을 격분시켰고, 그 후 경찰이 서북청년단에 합세함으로써 감정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어 급기야 극한의 도민폭동으로 전개된 것으로 본다. 4·3 사건은 결코 공산주의 이념투쟁 폭동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라고 나는 확신한다고 김익렬 장군은 기록하고 있다.
4·3 평화기념관 제 1 전시실 동굴 입구를 들어서면 둥근 원형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있다. 천정으로부터 외부의 빛이 쏟아지는데 방한가운데에는 비문이 새겨지지 않은 백비가 누워있다. 아직도 백비로 남아있는 까닭은 4·3 이 아직 제 이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훗날 언젠가는 누워있는 비석이 세워지고, 비문이 새겨질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