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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정 Dec 10. 2023

전쟁 같은 맛

                 

  어머니가 음식을 거부한다. 어머니는 조현병을 앓고 있어 음식을 거부하라는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자녀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먹게 하려고 애쓴다. 거의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어머니는 라면과 과일 통조림만 조금 먹을 뿐이다. 자녀는 단백질 보충을 위해 분유를 드린다. 분유를 본 어머니는 “그 맛은 전쟁 같은 맛이야.” 하며 진저리를 친다.


  제목이 <전쟁 같은 맛>이란 책을 구해 읽고 있다. 이 책은 부산 텍사스촌에서 일하던 어머니와 상선 선원이던 백인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한 혼혈여성이 쓴 책이다. 현재 뉴욕에 있는 대학에서 사회학과 인류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어느 날 신문에서 “엄마는 양공주였지만 부끄럽지 않아… 나한테는 영웅이니까”라는 기사 제목과 엄마라는 존재를 글쓰기로 되살리고 싶었다는 내용을 읽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상실의 슬픔을 글쓰기로 달래 보려 시작한 프로젝트이며 온갖 꼬리표를 넘어서는 존재였던 그분의 모습을 기억하려는 개인적 여정의 일환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타락한 여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았다. 정신병을 앓고 있었지만, 이성적인 존재였다.


  어머니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전쟁으로 가족의 절반을 잃고 의식주를 책임져야 했다. 그녀의 딸은 어머니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나아가 500페이지에 가까운 책으로 써내어 ‘전미도서상 논픽션부문’ 최종 후보까지 된다. 딸은 나쁜 말이었던 양공주라는 단어의 의미를 글쓰기로 바꾸고 싶어 했고, 그 단어가 수치스러운 말이 아니기를 소망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딸의 소망대로 그 단어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을까 의문을 품었다.    

 



  부산은 내가 십 대 시절을 살았던 도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의 전근으로 마산에서 부산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회사에서 가깝고, 학군도 좋은 대신동에 집을 구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던 시절이었다. 전학한 초등학교는 입학 성적이 아주 우수했다. 덕분에 나는 무사히 좋은 중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졸업한 중·고등학교가 모두 대신동에 있어서 나의 행동반경은 대신동과 그 주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월말고사가 끝난 날이나 방학 때면 친구들과 광복동 쪽으로 놀러 나가곤 했다. 그곳 역시 걸어서 30분 거리였다. 어쩌다 큰맘 먹고 멀리 놀러 나갈 때도 있었는데 부산역이 있는 초량 쪽이었다.


  그 당시 부산에는 아이들이 절대 가서는 안 되는 곳이 있었다. 눈길도 주면 안 된다는 곳이었다. 그곳은 밤이면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거리였다. 외국인과 그들을 접대하는 아가씨들이 많은, 서양 영화 속의 한 장소 같았다. 아이들은 멀리 지나가면서도 호기심에 흘끔거리기도 했다. ‘초량 텍사스촌’이라 불리던 그곳은 부산의 중심가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멈추어 서서 그 거리를 자세히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그곳의 영상은 머리에 남아 있다. 그 거리는 6.25 전쟁 중에 조성된 외국인 전용의 환락가였다. 밤마다 1백여 발의 총성이 들리고, 2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죽어나가기 일쑤였다. 마치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무법천지 같아서 텍사스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텍사스촌에서 250여 명의 혼혈아가 미국 등에 입양되어 갔다. 단일민족, 단일국가 기치를 내걸었던 대통령은 혼혈아동의 존재를 사회적 위기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이 아이들을 해외 입양대상자로 만드는 대통령령을 선포했다.


  저자의 어머니 군자 씨도 텍사스촌에서 일했다. 『전쟁 같은 맛』의 표지가 바로 텍사스촌 풍경이다. 군자 씨는 자신이 낳은 혼혈아기를 절대 놓으려 하지 않았다. 한 상선 선원이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던 군자 씨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다. 아들보다 6살이 적은 딸이 태어났다. 아이들과 함께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겠다고 결심한 군자 씨의 꿈을 남편이 이루어주었다. 그러나 정착했던 남편의 고향은 미국 내에서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가장 심한 곳이었다.


  미국에서 군자 씨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한 도전적인 여성이었다. 딸은 어머니를 회상하며 자기에게는 세 가지 모습의 엄마가 있었다고 말한다. 유년기의 엄마는 요리를 좋아했고 활기찼고 이상적인 엄마에 가까웠다. 두 번째 엄마는 조현병으로 아무것도 못한 채 사그라지고 있었다. 세 번째는 딸을 당신의 요리사로 받아들이고 어릴 때 먹었던 한국 음식을 가르쳐주며 되살아난 엄마였다.


  6.25 전쟁 중이던 아홉 살 때 군자 씨는 가족과 헤어져 혼자서 몇 달을 버티며 살아간다. 그 후 가족과 만났지만, 아버지와 오빠가 죽고 가장 사랑하던 큰언니도 죽고 만다. 막내딸이던 군자는 양공주가 되었다.


  군자 씨는 나보다 열한 살이 많을 뿐이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해도 꼭 그런 일을 해야 했을까? 어렵다고 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가 아무리 없던 시대였다 하더라도 공장도 있고 다른 노동하는 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군자 씨처럼 배고파본 적도 없고, 전쟁으로 가족도 죽지 않았다. 그 처지에 서지 못한 사람이 군자 씨를 판단할 수는 없다. 상상해 본다. 만일 군자 씨가 우리 부모가 그랬듯이 자녀의 교육에 열심을 낼만한 부모가 있었고, 좋은 환경이었다면 어떠했을까. 군자 씨는 열심히 공부하여 정말 좋은 상급학교에도 진학하고 자신의 딸처럼 전문 직업을 가졌을 것 같다. 그녀는 인생을 열심히 살고 참 도전적인 여성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자 나는 용기 있는 여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풀 길 없어 혼자서만 몸부림치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처음으로 발언했던 김학순 할머니가 생각났다. 숨죽이고 살던 그들이 김학순 할머니 발언 이후 한국에서, 중국에서, 세계의 각처에서 봇물 터지듯 증언을 쏟아내며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다. 자신의 아이를 기어이 자기 손으로 키우려고 노력했던 군자 씨, 그녀의 딸 그레이스 조, 모두 참 용감한 여성들이다. 말년에 군자 씨는 기지촌 여성을 다룬 딸의 책 출판을 지지해 주었고,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도 지지했다.


  김학순 할머니 덕분에 군 위안부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바뀌었듯이 이 책으로 인해 나에게는 양공주라는 단어의 의미가 달라졌다. 가장 큰 소원이 교육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던 군자 씨, 어려서부터 말할 수 없는 숱한 고통을 겪었지만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도전적이었던 그녀 덕분에 단어의 의미가 바뀌었다.          

                    

( 문예지《계간수필》 2023년 겨울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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