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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정 Feb 29. 2024

등대처럼

         

   우연히 찾아간 곳에서 역사를 만날 때가 있다. 그 역사가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고, 사유의 길로 나아가게 할 때 그곳은 특별한 장소가 된다. 영주 땅과 소수서원이 그랬다.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방문한 날은 코로나19로 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어느 봄날이었다. 서원 안에는 방문객이 우리 일행 둘 밖에는 없는 듯, 그 넓은 소나무 숲에도, 서원을 돌아 흘러가는 죽계천변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조용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소수서원은 신들의 정원 같았다. 숲에서 나오는 기운 때문이었을까, 옥빛을 머금은 맑은 죽계천과 그 뒷산을 감싸고 있던 비안개 때문이었을까, 신비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처음 보았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솔숲이지만 소수서원의 숲은 특별했다. 마당 가득 300년, 400년 된 소나무 수백 그루가 우람하고 기품 있게 서서 방문객을 맞았다. 서원마당에 1000여 그루를 심어 그곳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소나무처럼 절개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던 신재 주세붕과 퇴계 이황 선생의 정신이 깃든 나무들이었다.


   소나무 숲이 그 아름다움으로 방문객을 한번 놀라게 한다면 그곳에서 뜻밖의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두 번째로 놀란다. 조선 초기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난 후 일어났던 비극적인 일은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배운다. 사육신 이야기다. 그런데 불의한 권력인 세조에 맞서면서 생긴 비극이 순흥에서도 있었다. 순흥에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그 지역 유지 몇 명이 단종복위를 모의하고 거사를 꾸몄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세조와 그의 측근 한명회가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인근 백성을 무참하게 죽였다고 한다. 순흥과 그 주변에 살던 1600여 명 중 300명 넘는 백성들이 무참히 학살되었다.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끝없이 흐르다가 멈춘 곳을 지금도 피끝마을이라 부른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밤만 되면 원혼들이 절규했을까. 그 절규는 90여 년 후에 백운동서원 죽계천 경(敬) 자 바위에 붉은 칠을 해 원혼을 달래니 그때서야 울음소리가 멈추었다고 한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처음에는 백운동서원이었다가 나라의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이 되면서 그 이름이 소수서원이 되었다. 오늘날 사립대학격인 서원이 생기기 전에는 국립대학인 성균관만이 서울에 있었다. 소과에 급제한 유생들이 공부하던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목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는 것이었고 교과목도 시험 위주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수서원은 달랐다. 퇴계 이황 선생이 소수서원에서 강학할 때 공부의 목적이 과거급제가 아니고 인간교육이었다고 한다. 교육의 방향이 참된 인간 형성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아지고 여러 피해가 커서 대원군은 서원 철폐령까지 내렸지만 서원이 생기면서 조선은 도덕적이고 건강한 유학의 나라를 지향하게 된다. 또 아무리 작은 고을이나 깊은 산골이라 해도 서당이 생겨 아이들은 그곳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교육은 사람을 성장시키고 변화시킨다. 그 교육기관이 단순히 공부만 하는 데가 아니고 전인격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더욱 영향이 크리라. 서원 내에 있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에서 나는 생각했다. 500년 동안 소수서원에서 공부했던 4000여 명의 유생들은 분명히 큰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서원에 입학할 때 그들은 대과 급제가 목표였다. 양반이 벼슬을 하지 않으면 어떤 좋은 직업도 갖지 못했던 그 시대에 과거에 합격해서 벼슬 얻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들은 과거시험에 붙기 위해서만 공부를 하지 않았으리라. 그들은 수백 그루의 소나무와 경(敬) 자 바위, 그리고 맑은 죽계수를 보며 역사를 생각하고 스승의 정신을 생각했을 것이다. 벼슬보다는 학문하는 사람이 되고 도덕적인 참다운 인간이 되길 바라는 퇴계 이황 선생의 정신이 계승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경렴정(景濂亭)에 둘러앉아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깊은 학문의 길로 들어가고 조선 선비의 정신을 키웠을 것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경(敬)의 사상, 유교의 가르침을 체득했을 터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목숨을 버리며 나라를 구한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지역이 영남 지역이다. 우리나라의 전체 서원 중 절반 이상이 영남지방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우연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밝은 대낮에는 그 존재가 희미하지만 캄캄한 밤, 어두울수록 그 존재를 드러내는 등대처럼 서원은 그런 역할을 했을 것 같다. 그 정신은 위기 때 더 빛을 발하며 면면히 이어졌으리라. 의병출신 독립운동가들과 영남 지역의 유림 등 여러 계층의 인물들이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단이 영주에서 결성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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